유대칠의 에크하르트 읽기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관한 마지스테르 에크하르트의 생각
참된 순종
참되고 온전한 순종은 모든 덕 가운데 높은 덕이며, 이런 덕 없이는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으며, 미사에서 강론하고 또 경청하고 기도하고 묵상 등에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온전히 참된 순종의 마음으로 수행할 때에만 유용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참된 순종은 그 일을 더 높게 하고 더 나은 것으로 만듭니다. 순종은 언제나 모든 일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이끌어 올립니다. 참으로 순종하는 것은 이미 선한 것에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며, 참된 순종으로 이루어진 일은 절대 훼손되거나 지워지지 않습니다. 순종 그 자체는 가지지 않은 선함이 없기에 굳이 불안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으로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 자신의 것에서 멀어질 때, 바로 그때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바라며 살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는 마치 자신을 위해 바라듯 그렇게 그들을 대신해 바라십니다. 내가 내 의지를 버리고 날 이끄는 이의 손에 내 의지를 맡기며 더는 나 자신을 위해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을 때, 바로 그때 하느님은 나를 대신해 의지합니다. (하느님이 온전히 내 안에 오셨으니 말입니다. 저의 의지가 되셔서 말이죠.) 만일 하느님께서 그럼에도 날 소홀히 여기신다면, 사실 하느님께선 하느님 자신을 소홀히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나 스스로 무언가를 의지하지 않아도 되며,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서 절 대신해 의지하실 겁니다. 이걸 꼭 기억하세요.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원하지 않을 때, 그때 하느님은 날 위해 무엇을 원하실까요? 나 자신을 나 스스로 버릴 때, 하느님께서는 필시 자신을 위해 의지하는 모든 걸 더도 덜도 말고 자신을 위해 의지하는 것과 온전히 같은 방식으로 날 위해 의지하실 분이십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그러지 않으신다면, 하느님께서는 바로 하느님 그 자신이신 진리를 무시하는 꼴이 되며, 참다운 하느님도 아닌 꼴이 됩니다.
참된 순종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혹은 “이런저런 것을 원합니다”라는 생각이 없어야 하며, 오직 우리 가운데 순수한 마음으로 우러러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기도는 “이런 능력이나 이런 현실의 길을 주소서”라고 말하는 게 되어선 안 됩니다. 혹은 “그렇습니다. 주님! 저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거나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 주님의 뜻과 뜻하시는 것을 저에게 허락하소서! 주님! 주님의 뜻애로 저에게 이루소서!”와 같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늘이 마치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순종하는 기도이기에 자기 욕심을 이루어달라는) 앞의 기도보다 훨씬 더 좋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참된 순종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기도를 온전히 잘 드린 게 됩니다. 참된 순종엔 “나는 이것을 원한다”라는 말이 없어야 하듯이,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없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참된 순종에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께서는 “하느님의 참된 봉사자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원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장 절실한 소망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칠의 풀이
참된 순종은 하느님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욕심으로 자기 영혼이 가득하면, 자기 원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원대로 사는 것에 방해가 되면 모두가 남이 됩니다. 혹은 자기 욕심을 위한 수단이거나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와 다투어야 하고 모두를 수단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건 참 괴로운 일입니다. 참 괴로운 일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집(我執)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이 땅 수많은 이들의 아픔을 보고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그들과 더불어 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집, 즉 자기를 위한 욕심을 버리면 그 자리에 이렇게 더불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욕심이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선 그 자리에 찾아와 마치 자기 자신의 일이라도 되듯이 우리를 위해 의지하는 건 우리가 욕심을 비운 대가로 우리 자신에게 주기 위한 화려한 재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과 더불어 있음입니다. 하느님께선 온전히 아집을 버린 이의 영혼에 찾아와 타인의 아픔과 더불어 있으라 뜻을 품으로 십니다. 그리고 그 뜻이 바로 우리 자신의 뜻이 될 때 우린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순종은 이 세상의 국가권력이나 종교권력을 향한 게 아닙니다. 참된 순종은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뜻이 내 삶으로 드러난 삶을 사는 겁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에 당시 무시받은 여인들, 여인이란 이유로 무시받던 이들이 교회권력이 아닌 국가권력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순종하며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이의 옆에 더불어 있었고, 아프고 힘든 이들의 그 괴로움을 품으로 더불어 있었습니다. 이게 참 순종의 삶인 겁니다. 하느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되어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유대칠 우리말로 옮기고 풀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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