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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16. 2024

싯다르타는 사람이다: 아집에서 벗어난 이

유대칠의 불교 공부

싯다르타는 사람이다.    

: 아집에서 벗어난 이


유대칠 씀 


“아난다, 절 대신해 카피라바투(Kapila-vatthu) 사캬족 사람을 위하여 그들이 도(道)를 듣고자 하는 마음에 있거든 다시 법을 설해주세요. 저는 등이 아파서 잠시 누워야겠습니다. 그러자 아난다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자기 옷을 넷으로 접어 깔고서 발에 발을 포갠 다음, 정념(正念), 정지(正智)를 지닌 채 오른쪽 겨드랑이를 아래로 하고 누웠습니다.”     

(『雜阿含經』 43:13 漏法)     


종교라면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을 들어줄 초월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그런 철학이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위한 다양한 초자연적 비유들이 있지만, 사실 그 비유의 핵심은 초자연적 존재에게 소원을 빌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욕심마저 끊어 버리란 가르침을 위한 비유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다. 그런데 온전한 사람이며 동시에 온전한 하느님이란 게 참 이해하기 힘들다. 사람은 시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하느님은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는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하느님은 무한하다. 이렇게 서로 다르다. 그런데 예수는 온전한 사람이며 동시에 하느님이다. 어쩌면 그 자체가 참 초자연적이다. 죽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죽어서 죽은 이들의 자리로 간다는 것 그 자체가 초자연적이다. 그러나 불교의 문을 연 싯다르타는 사람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보통의 사람이다. 아프기도 하고 아파서 자신이 할 일을 벗에게 부탁하기도 하고, 식중독으로 죽음에 이르는 보통의 사람이다. 물론 보통의 사람보다 더 치열하게 이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궁리하고 또 궁리한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다. 신으로 우리를 이끄는 존재도 아니다.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신이 없을 때 온전히 완성된다. 우리 모두 생각하는 신은 우리 욕심을 이루어주는 초자연적 존재다. 병든 이에게 초자연적으로 치유의 은사(恩賜)를 내려주는 존재, 가난한 이에게 초자연적으로 소유의 은사를 내려주는 존재, 그런 존재다. 그러니 종종 치유의 은사를 받은 이나 소유의 은사를 받은 이들이 신도 앞에서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거나 모범으로 삼으라며 간증(干證)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은사 자체 바라는 마음 자체로 욕심으로 본다. 사실 착하게 살면서 더 힘들고 더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가 아주 비참하게 죽어가는 걸 우린 어렵지 않게 본다. 왜 신은 그들의 그 진실함과 그 아픔을 그냥 두었는가? 그런데 사악한 마음으로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차지하고 수많은 국민을 죽이고도 마지막까지 잘 살았던 독재자들의 삶도 우린 알고 있다. 이런저런 병에 걸려도 잘 치료받고 참 오랫동안 잘 사는 걸 우린 봐왔다. 도대체 신은 왜 그 악한 이에게 그런 은사를 내린 것인가? 사실 신의 마음을 우린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는 신의 마음을 누군가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소리를 내면, 어느 순간 그가 신이 되어 있다. 신의 소리가 곧 그의 소리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의 말이 곧 계시이고 진리이고 우리 삶의 길이 된다. 그리고 종종 알 수 없는 신의 그 불합리한 행동을 그들 나름의 말솜씨로 이래저래 적당히 욕망을 위로(慰勞)하는 화장(化粧)하면, 어느 순간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 있다. 그 소리가 신의 소리로 올리면 결국 신의 뜻을 가장 잘 안다는 이의 욕심이 교묘히 녹아든 소리가 신의 이름으로 울리는 꼴이 된다. 결국 그런 종교는 욕심으로 사는 종교다. 그 신앙은 결국 욕심으로 이루어진 신앙이다. 신의 소리를 가장 잘 안다는 이는 죽음의 불안, 영원한 삶을 향한 욕심, 이런 것에 이 세상의 부유함과 권력을 더하여 이야기할 것이니 말이다. 그런 거짓 신의 소리를 참으로 알고 만들어진 신앙이니 말이다.     


불교는 신이 없는 종교다. 불교는 우리 욕망을 이루어줄 초자연의 존재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신이 있다고 해도 그 신 앞에 우린 욕심 없이 마주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신 역시 온전한 신이라면 그럴 것이다. 온전한 신이 욕심 가득한 심술쟁이는 아닐 것이니 말이다. 불교는 신이 없는 종교이기에 신으로 인도하는 이가 없다. 신과 나를 연결해 주는 이도 없다. 즉 사제(司祭)가 없다.      


해탈의 길로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끈 존재는 없다. 나는 내 해탈의 길을 내 궁리함으로 나아가야 할 수도자다.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크게 ‘바라문(婆羅門)’의 철학과 바라문을 비판하는 ‘사문(samana, 沙門)’의 철학, 이렇게 두 종류의 철학으로 나누어진다. 불교는 사문의 철학이다. 즉 수도자의 철학이고 종교다. 불교의 수도자는 신을 향하여 걸어가지 않는다. 불교의 수도자는 신과 하나 되기 위해 수행의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욕심과 아집에서 해탈하여 온전히 비어 있고자 애쓰는 이들이다.      


등이 아파도 “나는 선생이니 내가 앞에서 이야기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등이 너무 아파서 서 있기 힘들어도 “나는 선생이야”라는 그 아집이 나를 지배하면 아파도 선생으로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 앞에 설 것이다. 그러면 괴로움이 늘어가게 되어 있다. 등이 너무 아파서 강단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스스로 괴로울 것이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선생을 보며 보고 있는 사람도 괴로울 거다. 그렇게 아집은 자기 자신도 괴롭게 하고 함께 있는 이도 괴롭게 한다.      


신을 믿는 종교와 철학은 신과 나 사이를 매개하는 사제를 인정하거나 사제와 비슷한 누군가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이 의무가 된다. 그 의무가 때론 나의 무엇임을 부여잡고 있는 ‘아집’이 된다. 신의 명령이니 나는 등이 아파도 나도 괴롭고 듣는 이도 괴롭지만, 사람들 앞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 괴로움을 신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벌이나 불순종의 징표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말이다.      


싯다르타는 등이 아프다며, 아난다에게 대신 설법해 달라 청한다. 그것도 들을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 앞에 서서 설법해 달라 청하다. 아집이 싯다르타를 등이 아파도 사람 앞에 서게 하지 못했다. 그런 아집도 그에겐 없단 말이다. 등이 아프면 그냥 등이 아픈 사람에게 충실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고 품어 줄 때 나도 괴롭지 않고 나로 인하여 누군가도 괴롭지 않다. 등의 아픔이 그저 등의 아픔이란 육체적 아픔에 머물 뿐, 마음의 괴로움이 되지도 않고 누군가를 향한 악행이 되지도 않는다.      


싯다르타는 아집 없는 수도자다. 그를 마치 대단한 초자연적 존재로 우리에게 기적을 내려줄 존재로 알고 있다면, 그것 역시 그런 믿음을 가진 이의 욕심이고 아집이다. 그가 아집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 살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수도자의 삶이다. 나를 비우고 또 비우며 살아가는 삶, 그렇게 내가 있다는 그 존재의 집착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무엇으로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이 싯다르타가 이야기하는 수도자의 삶, 사문의 삶이다. 내가 듣기엔 말이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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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서 2021년 사진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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