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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14. 2024

‘있음’도 ‘없음’도 내 참모습이 아니다: 중도(中道)

유대칠의 불교 공부 

있음도 없음도 나의 참모습이 아니다.

불교의 중도(中道)     


“비구여, 출가한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선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욕망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고 추합니다. 범부(凡夫)의 소행이니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건 그저 괴로울 뿐이니 이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도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우쳤습니다.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합니다. 그리고 적정(寂靜; 마음에 번뇌가 사라지고 고요해서 편안함)과 증지(證智; 참다운 지혜를 체득함)와 등각(等覺;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평등함과 싯다르타를 두하는 말이기도 함)과 열반(涅槃)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됩니다.”

(『雜阿含經』 15:17 「轉法論」)     


결혼하고 자녀를 두고 살아가는 삶에서도 해탈(解脫)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삶에서도 얼마든지 출가할 수 있단 말이다. 굳이 눈에 보이는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출가할 수 있고 해탈에 이르는 삶을 궁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 굳이 그 삶이 엄격한 고행(苦行)으로 채워지지 않아도 충분히 해탈에 이르는 삶을 궁리하여 살아갈 수 있다. 중요한 건 자기 아집을 도려내고 자기 삶에 생긴 그 빈자리, 욕심 없는 그 자리를 빈 채로 살아가려는 궁리함의 마음,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발심(發心), 굳이 발심이 일어났다고 하여 눈에 보이는 수행자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발심, 즉 보리심(菩提心)이 일어났다고 함은 ‘고집멸도(苦集滅道)’와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우치고 그 깨우침으로 자기를 돌아보며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의 삶을 살아가며, 아집과 욕심을 비운 자리, 괴로움을 비운 자리, 그 비움으로 생긴 빈자리에 아프고 힘든 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사살 자기 욕심으로 살아가면 욕심 밖의 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욕심으로 세상을 보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세상을 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그냥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있는 모든 건 영원하지 않고 이루고자 하는 것 역시 영원하지도 영원한 만족을 주지도 못하고 괴로움만 남긴다. 그 괴로움을 위해 모두를 수단으로 삼으며 살아가면, 자기 존재는 자기 자신에게도 독이고 남에게도 독이다. 발심은 참으로 제대로 연기의 세상을 깨우쳐 이런 삶에서 벗어나 욕심을 비우며 괴로움을 비우겠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비우면 수단으로만 보이던 이들의 아픔이 보인다. 함부로 괴롭힐 수 없고 죽일 수 없다. 이런 삶은 꼭 눈에 보이는 출가를 한 이에게만 허락되는 게 아니다. 유마거사(維摩居士)와 같이 눈에 보이는 출가, 즉 출가수행자가 되지 않아도 싯다르타의 철학을 고민하며 일상의 욕망에서 자유로이 보이지 않는 출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유마거사의 깨우침이 출가수행자의 깨우침보다 덜 하지 않음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는 자기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자기 성기(性器)를 도려내기도 했다. 초월에 이르는 여정은 이렇게 가혹했다. 이 정도의 고행은 아니라도 고행은 그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강조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고행이 초월에 이르는 여정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초월이 머무는 곳에 가려는 마음이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아니다. 싯다르타는 초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초월을 향해 가려는 그 마음이 욕심이고 아집이다. 출가수행자나 성직자 혹은 목회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보다 그 초월에 더 가깝고 더 거룩한 존재라 여긴다면, 이것도 아집이다. 그 아집은 자기 자신을 높이며 자연히 다른 이를 낮추어 보게 만든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서 앉는 걸 당연시하고 다른 이가 낮은 자리에 앉는 걸 당연시한다. 이런 마음에서 참다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가능하겠는가? 어쩌면 자리(自利), 자기만 이롭게 할 뿐, 이타(利他), 남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자기와 남 모두에게 좋을 수 있는 자리이타가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초월에 가깝다는 말로 자기 자신의 아집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들 뿐, 사실 아집은 아집일 뿐이다.      


초월, 그 초월은 이 세상의 밖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 아집을 비우고 살아가는 삶이 초월의 삶이다. 자기 아집과 욕심을 벗어던지는 그 삶이 곧 초월이다. 그러니 초월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여정, 삶이 모습이 되어야 한다. 자기 아집과 욕심을 벗어던지는 삶의 모습 말이다.      


욕심을 초월하면 그것을 극복하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본다.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무엇을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 바로 그때 나는 나를 나의 욕심 속에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게 되고, 그러면 삶과 죽음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싯다르타는 ‘중도(中道)’를 이야기한다. ‘중도’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거다.      


나는 수많은 인연이 만나 이루어진 거다. 그 인연이 하나로 모여 내가 되듯이 흩어지면 나는 사라진다. 그냥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다. 그러면 흩어짐에 아프지 않을 수 있고, 흩어지지 않으려는 아집에서 벗어낼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다.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 누리게 되는 자유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고, 바로 그 해탈로 인해 열반에 이르게 된다. 있고자 한다면, 영원토록 있고자 한다면, 오직 그 있음에만 집착한다면 어쩔 수 없이 괴롭다. 우리 존재의 처지가 그렇지 않은데, 있음에만 집착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있음도 없음도 나 하나의 온전한 모습이다. 있음에만 집착하여 괴로워할 것 없고, 없음에만 집착하며 겁먹고 불안해할 것 없다. 나는 원래 없던 것이 모여 이루어진 원래 없던 것이니. 이 있음도 찰나일 뿐이니.     


나의 마음에 의하여 극락이 아닌 지옥을 사는 나다. 그러니 나의 마음을 바르게 잡아야 한다. 감각 사물의 탓이나 누구의 탓이 아닌 내 마음의 탓이다. 욕심 가득한 내 마음 탓이다. 초월을 긍정하며 그 초월에서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사정한다. 그러나 불교는 사정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지옥을 사는 건 나의 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답도 내가 가지고 있다.      


어쩌면 불교가 많은 이에게 긍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어떤 종교는 누군가가 더 이상적인 초월 세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신에게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같은 공간에 더불어 살지만 아무리 평등하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 종교인은 더 높은 위치에서 더 거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아집에서 평등은 온전히 이루어지기 힘들다. 불교 역시 많이 변질되어 지위의 아집이 보이지만 그 근본은 그런 모든 아집에서 벗어남이다. 그리고 그 벗어남 속에서 모두는 평등하다. 그리고 그 평등함 속에서 모든 욕구는 침묵한다. 돈을 향한 욕구가 침묵하기에 돈으로 위계를 만들지 못하고 권력을 향한 욕구가 침묵하기에 권력으로 위계를 만들지도 못한다. 초감각적 초월 세상을 향하여 고행할 필요도 없고 부자가 되기 위해 돈벌이에 미치지 않아도 되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권력을 향하여 미쳐갈 필요도 없다. 그냥 여기 나를 있는 그대로 보면 그만이니 말이다.


유대칠 씀


[대구에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삶에 녹아드는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을 더불어 누리고자 한다면,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자 한다면, 연락 주셔요. oio-44o4-0262로 꼭 문자를 먼저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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