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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25. 2024

이현승의 '똥개' 읽기

유대칠의 시 읽기 

똥개 

이현승     


굴욕을 경험하면서

굴욕과 식욕을 구분하면서

똥개는 비로소 개가 된다     


종속과목강문계에는 똥도 똥개도 없는데 

똥을 먹는 개의 새끼로서

똥을 싸는 사람의 친구로서     


나의 맨 처음 친구였던 뽀삐는

내가 앞마당에서 엉덩이를 내릴 때면

벌써 저만치에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는데

흠집 없는 충성심과 우정의 발로였는데     


쌈밥집에서 화장실을 다녀온 사람의 손을 유심히 보거나 만두방 아저씨가 거스름돈을 건네고 다시 만두를 빚을 때 이건 일종의 강박이 되겠지만     


언젠가 당신 앞의 참혹 앞에서

문득 당신이 침을 삼킬 때

굴욕이 아직 견딜 만할 때      


유대칠의 어설픈 주관적 감상문     


똥개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다. “종속과목강문계에” 똥개는 없다. 하지만 똥개는 분명 있다. 우리 옆에 산다. 우리 눈앞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 분명 존재한다. “똥을 먹는 개의 새끼로서” 우리 옆에 존재하고, “똥을 싸는 사람의 친구로서” 우리 옆에 존재한다. 집 안 거실에서 마치 사람이 된 듯이 소파에 누워 값나가는 좋은 사료를 먹으며 사람의 가족이 되어 사는 개는 아무리 잡종이라도 똥개가 아니다. 똥개는 우리를 무척 사랑하지만 아무리 추워도 집 밖에 산다. 똥개가 추운 건 그냥 똥개의 추위지, 우리 가족의 추위가 아니다. 그때 똥개는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듯 우리와 함께 살지 않는 존재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 옆에 있지만 우리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버려진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말이다. 똥개조차 불만 없이 말이다.      

똥개는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을 먹거나 사람이 먹고 쓸모 있는 영양분은 취할 만큼 취하고 버린 똥을 먹는다. 똥을 준다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불만을 품으며 살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똥개가 아니다. 똥개의 자격이 없다. 굴욕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똥개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듯 그들에게 굴욕이란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생물학적 존재로 똥개는 없지만, 몸을 가진 존재임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식욕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의 욕구로 그들에게 박혀있다. 식욕이면 굴욕은 문제 될 것 없다. 굴욕을 모르기에 똥을 주는 이도 그냥 주인이고 벗이다. 자신을 무시하고 결국 자신을 잡아먹을 누군가의 차가운 미소도 그저 자신의 식욕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존재의 미소일 뿐이다. 똥을 싸기 위해 “앞마당에서 엉덩이를 내릴 때면 벌써 저만치에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게 똥개다. 그러면서 “흠집 없는 충성심과 우정”으로 존재하는 것도 똥개다. 하지만 생물학적 존재도 아니고 가정의 일원도 아닌 그런 존재가 똥개다. 굴욕을 모르는 존재, 몰라야 조금 더 편히 사는 존재, 그게 똥개다. 그러니 똥을 주는 “‘사람을 좋아라’하고 반가운 마음에 멀리서도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그게 똥개다.      


“쌈밥집에서 화장실을 다녀온 사람의 손을 유심히 보거나 만두방 아저씨가 거스름돈을 건네고 다시 만두를 빚을 때 이건 일종의 강박이 되겠지만” 사실 그건 그들의 위생 문제일 뿐,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참혹 앞에서” “침을 삼킬 때” 그때 나는 굴욕 앞에서 내 또 다른 욕구의 만족으로 침을 삼키는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나는 똥개가 된다. “굴욕이 아직 견딜 만”하고 나는 식욕을 위해 굴욕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무엇으로 여기며 굴욕을 던지는 누군가를 향하여 침을 흘리며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는 똥개 짓을 한다.     


“굴욕을 경험하면서 굴욕과 식욕을 구분하면서 똥개는 비로소 개가 된다.” 있어야 할 모습 혹은 있어 줬으면 하는 모습, 그 좋은 모습이 있지 말아야 할 모습 혹은 있지 말았으면 하는 모습과 구분될 때, ‘굴욕’이 무엇인지 알고 식욕과 그것을 구분할 때, “똥개는 비로소 개가 된다.” 생물학적 존재가 되고 사람 가족의 일원이 된다. 토라지기도 하는 감정의 존재가 된다. 집 밖 추위에 죽어가도 그만인 존재가 아닌 집 안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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