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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Mar 14. 2024

김소연의 '촉진하는 밤' 읽기

유대칠의 시 읽기 

촉진하는 밤 

김소연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준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유대칠의 어설픈 주관적 감상문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내가 아닌 온전히 너를 위한 밤, 나는 너에게 배운 그 일을 한다. 어쩌면 네가 아픈 나에게 해주었던 그 일을 그 추억의 일을 하나하나 따라 한다. 어쩌면 지금 나는 그날의 네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추월해 미래를 달려간다. 미래로 달려가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지금을 본다. 미래에서 보면 지금의 이 힘겨움도 그냥 과거의 추억이다. 지금 ‘펄펄 끓는 너’가 추억 속에 담기면 그때 펄펄 끓던 네가 되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다닌 네가 된다. 미래에서 바라보는 지금의 너, 즉 미래의 편에서 추억하는 너를 말이다. 그러니 너는 좋아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지금 이 노력이란 것도 참 서글프다. 죽을병도 아닌 이 병 앞에서 나는 젖은 수건으로 너를 닦으며 펄펄 끓던 네가 될 펄펄 끓는 너를 돌보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이 힘겨움과 너의 그 힘겨움은 느리지만, 빠르게 시간을 추월해 가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이 노력이란 것도 그렇고 이 아픔이란 것도 말이다. 그런데도 느릿느릿 흐르는 이것은 힘겨운 나와 너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라는 말이 그럴듯하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지금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그 과거의 나는 무척 힘들었다. 너 역시 그렇다. 펄펄 끓었던 나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던 너도 그렇고, 펄펄 끓던 나도 힘들었다. 너무 아픈 탓에 아파지는 과정보다 아팠던 순간만이 박혀 떠나지 않는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그렇게 아파도 결국 지금 나는 이렇게 있는데, 아픈 순간을 쉼 없이 불러오는 추억이란 바퀴벌레는 죽이고 싶은 그 무엇이다. 그렇게 불쾌한 추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차피 나을 지금 이 고통을 느릿느릿 지속하며 능멸하는 마음은 더 강해진다. 원래,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니 말이다. 고통이 심으면 아픈 추억이 지금의 이 고통과 아픔을 더 불편하게 하면 지금 나를 능멸하는 그 모든 것이 더 싫다. 그럴수록 나는 더 빨리 시간을 추월해 지금을 추억하며 위로한다. 어쩌면 무력한 위로이지만 말이다.      


추억 밖 현실의 너를 본다. 이제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이 펄펄 끓는 열에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그리고 남은 건 모두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생각한다. 느릿느릿 싫은 지금은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으니.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그냥 끝나 버리라고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시간을 추월해 가서 추억한 너와 같이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이게 뭐지.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를 마주한다. 그냥 시간이 지났다. 젖은 수건을 애쓰던 나의 애씀보다 이건 그냥 시간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걸지 모른다. 우린 이렇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너무나 다행히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참 좋구나” 고백하게 된다. 

치열한 나의 애씀도 사실 별것 아니고, 그냥 어제에서 오늘이 되었을 뿐이다. 그 시간의 호위 속에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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