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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Mar 04. 2024

라틴어 시편 읽기 시편 1편 2절 '상생의 길'

유대칠의 라틴어 시편 묵상하기 

시편 

Psalmi     


유대칠 옮김     


시편 1편

Psalmi, CAPITULUM 1     


1. 복된 자, 그는 불경한 이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머물지 않으며, 역병의 의자에 앉지 않는 자입니다. 

1.beátus vir qui non ábiit in consílio impiórum et in via peccatórum non stetit et in cáthedra pestiléntiae non sedit 

2. 하지만 주님의 뜻은 그분의 법 가운데 있으니 그는 낮이든 밤이든 그 법 가운데 깊이 생각합니다. 

2.sed in lege Dómini volúntas eíus et in lege eíus meditábitur die ac nocte 

3. 그리고 그는 흐르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고, 자기 시간이 되면 자기 과실을 맺을 것이고, 그 잎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번창할 겁니다.

3. et erit tamquam lignum quod plantátum est secus decúrsus aquárum quod fructum suum dabit in témpore suo et fólium eíus non défluet et ómnia quaecúmque fáciet prosperabúntur 

4. 불경한 이들은 그렇지 않으니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땅바닥에 흩날리게 하는 먼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4.non sic ímpii non sic sed tamquam pulvis quem proícit ventus a fácie terrae 

5. 그러므로 불경한 이들은 심판에서 잘되지 않을 것이고, 죄인들은 의로운 이의 충고에서도 잘되지 않을 겁니다.

5.ídeo non resúrgent ímpii in iudício neque peccatóres in consílio iustórum 

6. 주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의 길을 아시며, 불의한 이들의 나아갈 바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6.quóniam novit Dóminus viam iustórum et iter impiórum períbit     


1편 2절 묵상     


2024년 도산서원 사진 유대칠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요? 가장 편히 생각하는 건 우리 욕심입니다. 내가 욕심내는 걸 어떻게 이룰지 생각합니다. 빠르게 얻는 방법을 생각하고 남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얻을 방법을 생각합니다. 원래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것으로 진화된 세상도 아니고, 누구의 것으로만 창조된 세상도 아닙니다. 세상은 서로 다른 여러 조각이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의 몫을 충실히 다해 이루는 거대한 하나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필요 이상 더 욕심을 부리면 거대한 하나를 가능케 한 ‘아름다운 조화’는 무너지고 곧 파멸을 향합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나 쉽게 우리 욕심을 생각하고 우리 욕심을 이루고자 애씁니다. 그 애씀이 커지면 커질수록 아름다운 조화는 더 빠르게 무너지고 거대한 하나는 파멸의 길을 가게 됩니다.     


‘소유(所有)’가 죄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공유(共有)’가 신앙의 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누군가 홀로 좋으라 우주를 창조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더불어 잘 살라고 서로 살 때 살고 죽을 때 죽으라고 창조하신 곳이 바로 우주입니다. 상생(相生)의 원리는 모두가 같이 잘 되는 게 아닙니다. 나무와 불은 상생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나무는 불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木生火). 하지만 나무는 죽습니다. 그러나 불은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재는 흙을 영양가 있게 살리고(火生土), 흙이 없이 금속이 있을 수 없으니 흙은 금속을 살립니다(土生金). 금속, 즉 차가운 덩어리는 공기 중 습기를 차가운 기운으로 덩어리지게 만들어 물이 되게 합니다. 즉 물을 살립니다(金生水). 그렇게 물이 고이면 그곳에 나무가 자랍니다(水生木). 결국 나무는 자기를 죽여 불을 살리면 결국 그 죽음이 자신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게 상생입니다. 나만 살겠다고 죽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죽을 때 주으면 남이 살고 그 남이 죽을 때 죽어 내가 사는 관계가 상생이란 말입니다. 나만 홀로 잘 사는 세상이 상생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는 세상, 그 내어줌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살리는 그런 세상이 상생의 세상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겁니다. 상생의 세상이 되기 위해 우선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나무가 불에 자기를 내어주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상극(相剋)은 죽을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만 홀로 살겠다고 남을 죽입니다. 나무를 흙을 이용하기만 합니다. 흙을 이기려고만 합니다(木剋土). 또 또 흙은 물을 이기려고만 합니다. 생기 있는 흙으로 있기 위해 물을 이용만 합니다(土剋水). 물은 또 불을 죽이려 합니다(水剋火). 자신의 차가움을 유지하기 위해 말입니다. 불도 당하고만 있지 않고 금속을 녹여 죽여 버립니다(火剋金). 금속, 즉 차가운 덩어리에 나무는 살 수 없습니다(金剋木). 이렇게 차가운 세상에 사람은 금속으로 조금이라도 자기만 더 따뜻하게 있으려 나무를 또 얼마나 죽이겠습니다. 이게 상극입니다. 서로 죽입니다. 자기만 살기 위해 그냥 죽이고 죽입니다.      


상생의 죽음은 남과 더불어 있으려는 희생이며 결국 자기 존재를 위해 스스로 거름이 되는 것이라면 상극의 죽음은 욕심에 살해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다고 하신 우주는 상생의 세상일까요? 아니면, 상극의 세상일까요? 분명 상생의 세상일 겁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 거라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상극의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만이 홀로 좋은 세상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참 이치는 상생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이 녹아든 하느님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면 우린 당장 우리의 지금이 부끄러울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끄러움의 자각이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이 하나 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하느님의 뜻을 품을 그분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 봅니다. 그러면 나만이 홀로 좋고자 살아가는 악인의 자리에 앉지 않게 될 것이고, 상극의 길에서 멀어질 것이고, 상생의 자리에서 죽을 때 죽고 살 때 부활하는 우리가 될 겁니다.      


시편 2편 2절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2. 하지만 주님의 뜻은 그분의 법 가운데 있으니 그는 낮이든 밤이든 그 법 가운데 깊이 생각합니다. 

2.sed in lege Dómini volúntas eíus et in lege eíus meditábitur die ac nocte      


유대칠 옮기고 묵상하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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