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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May 27. 2024

김혜진의 소설, '너라는 생활'

유대칠의 소설 읽기 

김혜진의 소설너라는 생활」      


소설가의 소설은 소설가의 생각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그런 각오로 세상에 나오는 게 또 소설이다. 아니, 글의 운명이다. 세상에 나온 순간, 그 글을 읽는 이의 지금과 만나 그의 지금 속에서 녹아들어 해석된다. 김혜진의 소설 「너라는 생활」도 마찬가지다. 소설가의 마음이 무엇인지 사실 잘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문학을 전공한 이도 아니다. 그저 글을 좋아하는 아무나 일 뿐. 그래서 편하게 읽어본다. 그리고 나의 지금에 녹아든 김혜진의 글을 적어 본다.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다. 누군가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부모 역시 짐이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지금 어디 있느냐 내 눈에 왜 안 보이느냐 등등 이런저런 걱정으로 나의 지금을 무시해 버린다. 이젠 나의 길을 가야 할 나의 시간임에도 부모는 애정이란 이름으로 나의 시간을 부수고 들어와 날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함부로 평가한다. 애정이란 이름이라 무엇이라 할 수 없다지만, 짐이 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모의 눈에 그리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지금의 나는 치열한 애씀으로 가득하다. 물론 어느 정도 신나기도 하고 말이다. 그들의 눈에 오답 가득해도 나에겐 최선을 다한 정답이다. 아니, 정답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부모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날 무시한다. 애정이란 이름으로 때론 걱정이란 이름으로 날 무시해 버린다. 마치 자기 머릿속 무엇이 정답표라도 되는 듯이 나에게 자기 정답을 강요한다. 부모도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도 나에겐 그렇게 남이 되어간다. 아니, 날 남으로 밀어낸다. 그들에게 우리가 되기 위해선 나로 있지 않으면 된다. 그들이 원하는 그들의 모습으로 살면 된다. 그들의 점수표에 항상 부족한 나이기에 항상 만점이 되지 못한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남으로 밀어낸다. 정확히 나를 정복하려는 그 속도만큼 나는 그들에게 남이 되려 달아났다. 나는 나로 살아야 했기에 말이다.      


가장 좋은 너는 나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따져 물으면서 따져 묻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네가 아니라, 그냥 부족하면 도와주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네가 필요하다. 그게 간절하다. 이런저런 훈수질을 하며 나를 손아랫사람으로 부리는 네가 아니라, 날 그냥 묵묵히 봐주는 너 말이다.     


대단하지 않은 족에 취직하여 가는 너, 그런 너의 옆에 있다. 왜 더 노력해서 더 좋은 곳에 가지 않는지 따져 묻거나 지금의 초라함을 동정하거나 점수 매기지 않고 그냥 그의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 그런 너의 옆에 있다. 그렇게 동행한다. 그 대단하지 않은 곳이지만, 그곳도 조직이고, 나름의 기준과 질서가 있다. 그 틀에서 그 엉성해 버리는 조직도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너는 경력 시간이 부족한 존재다. 원서 자체를 내밀 수 없는 존재, 자격이 되지 않는 존재다. 그런 것도 확인하지 않는가 따지는 누군가와 달리 나는 그저 그런 너의 옆에서 너를 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넌 지체 장애 중학생의 활동 보조자가 일했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 모든 게 쉽지 않은 중학생이 보고파하는 연극, 그 연극을 보여 주기 위해 너는 기꺼이 애를 썼다. 그러나 남겨진 건 학생에게 남은 상처와 그 상처에 분노한 학부모 그리고 너의 해고다. 그 시간을 다 적었다면, 너는 경력이 부족한 존재가 되어 여기 이렇게 누군가에게 자기 경력 부족을 제발 그냥 넘겨달라 사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남인 너의 그 간절한 사정도 그저 자격 없는 이의 떼씀 정도일 뿐이다. 그냥 버린다 해도 받는 시늉이라도 하질, 너 대신 화를 내려 하지만 너는 그런 나를 잡고 나선다. 그렇게 서로가 남이 아닌 나와 너, 나는 너의 그 아픈 자리에서조차 그저 너의 옆에 너와 있다. 너를 초월한 무엇이나 너를 평가할 무엇이 아닌 너에게 너인 나로 말이다.     


시간이 지나, 새로운 일자리에서 너는 한때 너와 같은 또 다른 누군가의 안타까움 앞에서 역시나 기준 미달을 운운하며 거절하는 이가 되어 있다. 그의 안타까움도 안타까움이지만, 당장 차갑게 거절하지 못하고 미루어지는 시간, 되지 않을 일을 고집부리며 조금씩 미루어지는 시간, 퇴근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새 직장 동료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의 안타까움보다 너 역시 조직의 기준과 너와 이런저런 사정이 먼저다. 나는 그런 너를 본다. 과거 자신의 앞에 차갑게 서서 원서를 받아주지 않는 그, 그의 그 차가움을 자신에게서 보는 너, 그리고 큰 실망과 분노에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은 과거의 너와 같은 지금 네가 거절한 누군가의 앞에 너, 그 모든 순간 옆에 서 있던 나는 너를 잡고 그곳을 떠난다. 무엇이 무엇인지 어느 것도 정답인지 굳이 말하지 않고 말이다. 이게 다행이지 굳이 말하지 않고 말이다. 그저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 정도를 혼자 하고 너의 옆에 있는다.     

김혜진의 글엔 왜 너는 그렇게 사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실패도 아니고 성공도 아닌 지금, 나쁘지 않은 지금을 변명하는 말도 없고 탓하는 말도 없다. 글 속 내가 너의 앞에 그렇게 서서 너를 보듯이 그렇게 보고 있다. 너 역시 굳이 이런저런 변명 없이 그 순간 나와 함께 있다. 마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순간 아주 당연한 조각처럼 그렇게 나는 너의 옆에 있다. 해석자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고 독재자가 되어주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너와 내가 그립다. 그런 너와 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게 부럽다. 짐이 아닌 벗과 더불어 있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나는 나로 봐주고 만나는 너, 너를 너로 봐주고 만나는 나, 이런 나와 너, 그냥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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