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May 27. 2024

우린 딴사람이 됐다!

유대칠의 더불어 있음의 철학 

전체같이 무서운 것은 없다만세를 한번 부르고 나자 민중은 딴사람이 됐다.”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 (파주: 한길사, 2009), 31쪽.     


잘 된 혁명은 누구 한 사람이 주체가 된 혁명이 아니다. 그런 혁명은 사실 민중, 우리네 씨알의 혁명이다. 누군가 선두에 서서 소리치면 수많은 이들이 수동적으로 따르는 혁명은 잘 된 혁명이 아니다. 잘된 혁명은 그 혁명의 이유에서 마지막까지 우리네 씨알의 자기 폭발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전체의 덕이란 말이다.      


삼일절은 순교했다.”

같은 책, 41쪽.     


삼일의 소리가 눈에 보이는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여전히 일제는 이 땅의 주인이라며 부끄러운 고개를 당당히 들고 있었고, 그 힘 아래 선 종노릇을 하지만, 막상 우리 앞에선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앞잡이 노릇을 하려던 친일파도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일제의 앞잡이로 우리를 죽이며 신나게 살을 찌우던 친일 경찰을 비롯한 온갖 역사의 좀 벌레 같은 이들이 해방 이후에도 경찰 완장이니 이런저런 완장을 차고 사회 정의니 외치며 자기 이득을 위해 우리를 이용하며 살았으니 눈에 보이는 역사를 바꾸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삼일의 그 소리, 그 뜻은 우리 모두를 바꾸었다. 우리를 흩어진 여럿이 아닌 서로 다른 생각에 서로 다른 종교라도 한 자리에 소리치는 전체로 만들어버렸다. 전체가 되지 못한 이 땅 국적으로 살지만, 우리가 되지 않은 혹은 되려 하지 않은 남을 가려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가짜를 가려내 온전한 전체가 되게 하였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생명을 죽었다고 해도 삼일의 뜻은 죽지 않고 부활한 순교자의 그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은 부활의 생명 말이다.      


씨알은 그것을 안다씨알만이즉 제도의 종이 되지 않은 인간만이 그것을 안다그러나 씨알은 하늘곧 전체의 씨알이기 때문에 독점독재하지 않는다.” 

같은 책, 44쪽.     


씨알은 전체다! 삼일의 소리는 누구의 소리가 아니다. 민족대표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 전체의 소리다. 저기 저 깊은 산골의 마을에서도 그 소리는 폭발하였다. 누가 이런저런 철학을 알려두고 교육해 낸 소리가 아니다. 더는 억울하게 살 수 없다는 우리네 쌓인 서러움이 ‘홀로’가 아닌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전체가 되어 외쳐진 소리다. 스스로 능동의 주체가 되어 외친 외침이며, 동시에 너의 아픔, 너의 억울함, 그 앞에서 아니 외칠 수 없어 손을 잡고 함께 외친 수동의 외침이기도 하다. 누가 외치라 하여 외친 외침이 아닌 서로가 수동이고 능동이 되어 손에 손을 잡고 외친 외침이란 말이다. 그러니 누가 주인 되어 외치지 않았다. 그런데 나쁜 정치인은 이런 뜻으로 가득 찬 혁명의 외침을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한다. 독재를 종식하게 한 2.28의 소리도 그리고 더 커진 4.19의 외침도 주인이 선동한 노비의 외침이 아니다. 삼일의 외침도 다르지 않다. 민족대표는 그저 그날 우리네 씨알과 더불어 외친 이들의 수단일 뿐, 그들의 외침에 우리네 씨알이 따라나선 외침이 아니다. 그러니 그 33인 가운데 변절자가 있다 해도 우리 씨알이 변절한 게 아니다. 삼일의 외침은 전체의 외침이다. 눈으로 보면 죽은 듯이 보이지만, 죽지 않은 외침, 뜻을 품은 외침이다. 그 뜻이 2.28의 외침이 되고, 4.19의 외침이 되고, 5.18의 외침이 되었다. 1946년 대구 경북 10.1의 외침에 부끄러운 모르는 이들이 총칼을 들고 그렇게 죽여도, 1948년 제주 4.3의 외침에 그렇게 죽여도, 같은 해 10.19 여수와 순천의 외침에 그렇게 죽여도, 1974년 인혁당 재건위 비극과 같은 사법살인으로 그렇게 죽여도, 19세기 동학혁명으로 한자리에 모여 전체의 소리를 낸 이후 우린 항상 이 땅 역사의 주체는 바로 우리 씨알임을 삶으로 보이며 살았다. 죽이고 죽여도 우린 다시 전체가 되어 소리를 냈다. 삼일절은 그렇게 매번 부활하고 부활한 거다. 그 뜻은 죽지 않고 일어나고 또 일어난 거다. 일제강점기 안중근이 죽어 사라져도 더 많은 안중근이 일어나 부활했고 독재의 시대, 김주열이 최루탄에 죽어 사라져도 더 많은 김주열이 일어나 부활했으며, 민중 탄압의 시대, 노동자 전태일이 온몸에 불을 내고 죽어 사라져도 그 많은 횃불이 되어 부활했으며, 1980년 5.18 그 많은 이들의 죽음도 죽어 사라진 게 아니라, 뜻이 되어 살아나 지금의 우리와 더불어 있다. 그렇게 삼일의 뜻은 죽지 않고 순교하려 부활하였다. 전체가 되어 부활하였다. 전체로 우리를 모이게 하였다. 더불어 있음의 힘을 깨우치게 했다. 

     

그러니 저기 저 부끄러움 모르는 친일의 잔재와 독재의 잔재가 삼일의 뜻, 그 죽지 않은 생명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역사를 더럽히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는 더럽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온전한 전체로 있어야 할 필요를 상기하게 할 뿐이다.      


우린 딴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