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철학 다지기
진짜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철학의 고민 가운데 하나는 “진짜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물음이 우리의 삶에 도대체 왜 중요한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물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를 생각해 보자. 이미 충분히 많은 돈이 있지만 그는 더 많은 돈을 원한다. 돈은 자신의 본질을 이루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돈이 안 되는 일은 가치 없고 돈이 없는 사람도 가치 없다. 즉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은 그의 삶과 그 삶 가운데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 자체를 지배한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가. “진짜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각자의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이 각자의 삶, 바로 각자의 무엇임을 결정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 고민은 어떻게 살아야 잘 것인가를 궁리하는 철학의 편에서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꼭 해야 하는 고민이다.
‘있는 것’ 전부는 의심할 것도 없이 ‘있는 것 그 자체’인가? 혹시 원래 ‘없는 것’인데 ‘있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 없는가? 아니면, 있긴 있지만 ‘제대로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어설프게 있는 것’에 빠져 속고 있는 건 아닌가? 철학은 이를 따지고 따져야 한다. 우선 가장 흔히 ‘있는 것’이라 믿는 ‘감각 대상’, 즉 ‘느껴지는 것’을 따져보자. 우린 가장 흔히 ‘감각 대상’을 ‘참으로 있는 것’이라 여긴다. 고대 철학자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도 ‘감각 대상’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감각 대상’은 모두가 생기고 사라진다. 태어나고 죽는단 말이다. 영원한 게 없다. 어떤 것이든 결국 사라진다.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지금 너무나 많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를 상상해 보자. 그 역시 태어났고 그 역시 늙고 그 역시 죽는다. 그게 생명 가진 모든 것의 운명이다. 어디 그뿐인가, ‘감각 대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건 그렇게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 생김과 사라짐 사이 쉼 없는 변화를 겪기도 한다. 사람에겐 이것이 노화(老化)다. 그 변화의 여정 동안 아름다워 보이던 건 늙어지고 전과 같은 모습으로 아름답지 않게 된다.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없다가 있게 되고 다시없게 되는 게 우리의 참모습인가? 이것이 ‘진짜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있는 것’은 결국 ‘없음’이 찰나의 순간 ‘있음’으로 반짝하다 다시 ‘없음’이 되는 여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국 그 본바탕은 ‘없음’이다. 이러한 사실을 수용한다면,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철학적 주장을 전개하게 된다. 우리의 본바탕이 사실 ‘없음’이라면 ‘무엇으로 있으려는 우리의 욕심’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질적인 모습으로 있게 한다. ‘참’에서 벗어나 ‘거짓’으로 우리를 내몬단 말이다. 그러니 본질적인 모습으로 있으려면, ‘무엇으로 있으려는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우주가 결국 그 본바탕은 ‘없음’이란 걸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없음’을 우리와 우주의 본바탕이라 보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다. 그는 ‘감각 대상’은 있기는 하지만, 온전히 제대로 있는 건 아니고, 제대로 있는 건,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영적인 것(spiritualia)’이라 보았다. 그 역시 모든 물체, 즉 감각적인 것은 생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와 우주의 참 ‘실체적 본질(substantia)’은 이러한 변덕스러운 감각 대상이 아니라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transcendentia)’이라 한다. 쉽게 말하면, ‘나’는 ‘이 몸’이 아니라, ‘이 영혼’이라 본 거다. ‘이 영혼’, ‘이 영적 존재’가 바로 ‘나’이지 ‘이 몸’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나’란 존재, 즉 ‘이 영혼’을 구속하는 ‘감옥’과 같은 것으로 본다. ‘감각 대상’과 같은 변덕스러운 존재가 주는 ‘온전하지 않은 기쁨’, 즉 ‘감각적 기쁨’에 빠져 ‘영적 기쁨’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참된 나’, 즉 ‘이 영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고 본다. 이 몸으로 느끼는 ‘감각 기쁨’은 ‘공존의 기쁨’, ‘더불어 기쁨’이 아닌 철저하게 ‘개인화된 기쁨’이고 ‘홀로 된 기쁨’이다. 그리고 이 ‘홀로 된 기쁨’을 더 철저하게 홀로 더 많이 누리기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은 서로 다투게 된다. 바로 그 다툼으로 공동체는 시끄러운 혼돈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감각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플라톤에게 참으로 좋은 건 나 홀로 좋은 게 아니라, 공동체 모두에게 좋은 거다. 가장 영적인 가치를 아는 이는 자기 혼자 좋은 걸 누리길 원하는 이가 아니라, 공동체 모두에게 좋은 걸 궁리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다. 플라톤에게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는 ‘철학자’다. 철학자는 홀로 좋음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박식함으로 과시하며 남을 무시하는 존재가 아니다. 진짜 세대로 박식한 이는 지식으로 가득 찬 이가 아니라, 슬기, 즉 지혜로 가득한 이다. 그는 남을 무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두의 좋음을 위해 애쓰는 존재다. ‘감각 대상’이 주는 찰나의 기쁨에 홀로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감각 대상’이 주는 그 ‘홀로 기쁨’을 위해 남과 싸우고 거짓을 일삼는 이가 아니라, 제대로 ‘더불어 살기’ 위해 애쓰는 이, ‘더불어 좋음’을 위해 애쓰는 이다. ‘참으로 좋은 것’은 ‘참으로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 ‘참으로 있는 것’은 누구 한 사람만을 위한 ‘홀로 좋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더불어 좋음’이기 때문이다. 모두를 ‘좋은 것’으로 있게 하는 ‘좋음의 형상’, 보통의 사람은 이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좋은 걸 따라 사는데, 철학자는 ‘참으로 있는 것’, 즉 ‘좋음의 형상’을 깨우치고 이를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는 이다.
무엇이 진짜 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유물론자와 플라톤주의자 그리고 불자는 서로 다른 답을 가지고 그 답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합리적 지혜를 실천한다. 즉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은 우리네 삶, 즉 윤리와 도덕에 깊은 영향을 준다. 그러니 철학자는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