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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May 18. 2024

철학은 각자의 답을 요구한다.

유대칠의 철학 다지기 

철학은 각자의 답을 요구한다.     


철학은 내 답을 만들어가는 거다. 철학은 묻는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 말이다. 그 물음에 내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내 철학’이고 ‘내 철학적 삶’이다.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의 철학을 달달달 암기하고 줄줄줄 읽었다고 해도, 그 철학자의 철학이 온전히 ‘내 철학’이 될 순 없다. 그와 나는 다른 존재다. 그가 그 철학으로 답한 현실은 내가 살아가는 이 현실과 다르다. 어떤 이가 지금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철학이 없는 이유는 유럽의 1968년 프랑스의 68 혁명과 같은 사건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 사건을 조건으로 화려한 유럽의 현대철학이 등장했는데 우린 그런 조건이 없어서 철학이 없단 말이다. 참 답답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제대로 철학을 하려면 유럽, 그것으로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1968년 프랑스라는 현실과 같은 현실이 아니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거다. 서로 너무나 다른 배경으로 가지고 너무나 다른 역사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1968년이란 조건에서 생긴 철학만이 답이고 그 철학이 온전히 구현되어야 올바른 세상이고 올바른 나의 인생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1968년 프랑스에 살지도 않았고 이곳 한국에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철학의 장에서 추방당한 불쌍한 이로 살아야 한다. 남의 철학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할 뿐이란 말이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결론은 이거다. 철학은 지금 여기 내 삶을 조건으로 내 궁리함으로 만들어가는 내 답이어야 한다. 남의 삶을 조건으로 만들어진 남의 궁리함으로 생긴 남의 철학은 상황에 따라 아주 좋은 참고서일 순 있어도 그 자체가 나에게 정답지나 해답지가 되어선 안 된다. 그건 내가 그에게 적어도 철학에서 식민지가 되겠다는 것뿐이다.     


철학은 묻는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 말이다. 철학의 보편성은 답의 보편성이 아니라, 물음의 보편성이다. 철학의 물음은 보편성을 가진다. 어떻게 사는 게 더 잘 사는가라는 물음은 고대 지중해 연안에 한정된 물음이 아니다. 공간적으로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사람에게도 이 물음은 뜻을 품은 물음이다. 시간적으로 아주 오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물음은 모두에게 뜻을 품은 물음이다. 바로 이 물음의 답이 지혜다. 그러나 그 지혜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대인의 지혜는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다. 지금과 너무나 다른 조건에서 살던 이들이다. 예를 들어, 우린 지금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이 너무나 중요하단 말이다. 그리고 우린 법적으로 신분제 사회를 사는 것도 아니다. 과거 많은 이들은 혹은 거의 모두 종교를 가졌지만, 지금은 아예 종교 자체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이 가득하다. 이처럼 우린 과거와 다른 세상을 산다. 고대는 고대의 조건 속에서 뜻을 품은 지혜가 있었다면, 지금은 지금의 조건 속에서 뜻을 품은 지혜가 요청된다. 물론 여기에서도 과거의 지혜를 쓰레기 취급하자는 말은 아니다. 새롭게 지금의 관점에서 읽으며 나름 유용한 참고서가 될 순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조건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그 지혜를 굳이 지금 여기의 정답으로 살 필요는 없단 말이다. 만일 과거의 지혜를 지금의 지혜로 살겠다면,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과거의 삶을 살면 혹시나 모르겠다. 과거와 같이 신분제 사회에서 자본 자유주의가 아닌 그 시대의 경제 정치 체제로 말이다. 그러나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그냥 과거의 지혜는 지금을 위한 참고서로 삼으면 그만이고 정답은 나의 궁리함으로 찾아가면 된다. 나의 정답을 과거의 지혜를 참고서 삼아 매우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내 철학의 여정이고 그 여정으로 만들어가고 진화해 가는 게 바로 나의 삶에 유의미한 철학, 내 삶에 뜻으로 다가오는 살아있는 철학이다. 누군가의 철학을 달달달 암기하고 그의 글을 술술술 암기해서 얻은 게 아니라, 나의 치열함으로 이룬 나의 철학 말이다.      


흔히 철학 공부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많은 경우, 철학 공부는 남의 답을 이해하는 것에 그쳤다. 그 답이 하나의 체계적 논리가 되어 우리의 머릿속에 거대하고 웅장한 이념의 궁전을 지었다고 해도, 우린 그 궁전에 살지 못했다. 그 궁전은 나의 고난에서 얻은 나의 절실함, 나의 필요, 나의 간절함 없는 누군가가 던진 정답대로 만들어진 궁전이었으니 말이다. 대단하지 않은 집이라 해도 나의 궁리함으로 세워진 나의 집, 그것이 우리 삶에 그리고 직접적으로 바로 여기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나의 철학이 된다. 바로 그 철학의 집이어야 나는 온전히 그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철학은 보편의 질문을 건지고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권한다. 그리고 나의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함’이다. 그 ‘철학함’에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도 조언자 이상의 자리를 내어주지 말자.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일구자. 이미 우린 우리 삶에서 스스로 서툴지만 조금씩 철학자들의 말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말로 일구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은 스스로 우리 집을 만들어가자. 나도 우리도 아닌 누군가가 만든 집에 우리의 자리는 없다. 적어도 철학은 그렇다. 우리의 집은 오직 우리 스스로 만든 철학으로만 가능하니 말이다.      


철학책을 읽는 것도 조언을 듣기 위해서지 그 철학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린 누군가의 명령에 움직이는 노예가 아니라, 그의 조언을 두고 진지하게 궁리하고 궁리하여 때론 비판적으로 따지고 따져 유익한 것을 취하고, 그 취한 것으로 지금 여기 내 삶이란 토대 위에 내 철학의 순단으로 집을 지어 올려야 한다. 걱정하지 마라. 혹시나 마음이 달랐지만 무너뜨리고 다시 지으면 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몇몇 벽을 허물고 새롭게 꾸미면 된다. 그 여정이 우리 삶이고 우리 철학의 여정이다. 


이제 한번 우리 철학의 여정을 시작해 보자. 그러기 위해 우선 토대를 다져야겠다. 



꽃 (사진 유대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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