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철학 다지기
철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철학은 ‘지혜를 사랑함’이다. 철학이란 말이 본래 그런 뜻이다. 본디 이 말은 유럽의 philosophia(필로소피아)의 번역어다. 그 본디 이 유럽 말이 지혜를 사랑함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혜란 걸 잘 생각해 보면, 이건 삶의 문제와 관련된다. ‘지혜롭다’는 말, 그 말은 ‘슬기롭다’는 말이다. ‘슬기롭다’는 말은 사리(事理)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함을 의미한다. 즉 ‘잘 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잘 살기 위한 힘을 사랑함이다. 쉽게 잘 살려는 애씀이다. 그냥 가만히 두면 우린 쉽게 혼자만 잘 살려한다. 홀로 잘 살고자 한다. 그러면 잘 살기 힘들다. 혼자 더 잘 살려 애쓰면 서로 다투게 되고, 서로 미운 마음이 생긴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하나 너무 힘이 강해 함부로 밉다 말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어 따른다 해도 따르는 이의 미움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 미움이 너무 커지면 이렇게는 못 산다는 마음에 다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다툼 가득한 곳에선 그저 강한 사람이 되어 한동안이라도 자기 힘으로 다른 이들을 억누르며 누릴 것 최대란 누리고 사는 게 최선이라 보인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려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려고 돈을 번다. 결국 홀로 더 많은 걸 더 오래 누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 홀로 있음에 ‘우리’도 ‘너’도 없다. ‘나’만 ‘홀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일시적 평화 속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결국 다툼의 자리에서 사는 것인데, 그것을 잘 사는 거라 할 수 있을까? 이건 분명 슬기롭지 못한 선택이다. 철학은 슬기롭게 살자는 애씀이다. ‘플라톤’도 결국 어찌하면 서로 다른 생각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한 공간에서 한 공동체로 더불어 잘 살 것인가를 궁리했다. 즉 가장 슬기로운 사회적 구조를 궁리했단 말이다. 이게 그의 대화편 <국가>에 나타난 그의 애씀이다. 어쩌면 그의 ‘이데아론’ 혹은 ‘형상론’이라는 복잡한 이론도 바로 이 슬기로운 사회적 구조를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원래 형이상학적으로 이 세상은 이러하니 이렇게 사는 게 가장 슬기롭다는 걸 합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수단 말이다. 나의 눈에 다른 철학자들의 철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철학, 즉 지혜를 사랑함이란, 어떻게 더불어 잘 살 것인가에 관한 애씀이며, 그때 철학은 참된 철학으로 뜻을 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철학은 멋진 말의 나열도 아니고, 그럴듯한 관념의 건축물도 아니다. 철학은 치열하게 지금 여기 구체적인 현실 속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고난, 그 고난 가운데 어찌 더 잘 살 수 있을지, 즉 어찌 더 슬기롭게 살 수 있을지에 관한 궁리함이다.
지금 나의 삶에 철학이 필요하다. 나는 쉼 없이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고, 그 더불어 살아감이 잘 살아감이 되기 위해 나는 항상 나름 애쓰고 있고 또 애써야 한다. 그 애씀이 멈추는 순간 ‘나’와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는 서로 계산기를 들고 각자의 이득을 계산하며 흩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불어 사는 우리도 서로의 이득을 생각한다. 하지만 나만이 홀로 더 많은 걸 바라겠다는 마음은 아니다. ‘더불어 좋음’을 바란다. 때론 조금 손해 볼 수 있고 때론 조금 더 이익을 볼 수도 있지만, 서로 주어진 현실에서 더불어 좋음을 궁리하며 선택해 살아간다. 즉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느 정도 철학자다. 나도 철학자이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도 철학자다. 단지, 대학의 철학과를 졸업하지 못했을 수 있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아예 학력이란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큰 문제없이 더불어 살아간다면, 물론 중간중간 약간의 서운함이 있어도 더불어 좋음을 위해 기꺼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면 우린 나름 우리 삶에서 철학자다. 이런저런 이론서를 쓰고 논문을 쓰지 않았을 뿐, 우리 각자의 삶에서 저마다 철학자다.
저마다 철학자로 살아가지만, 종종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린 선배 철학자나 전문 철학자의 이론에 도움을 받을 필요를 느낀다. “이 친구와 일하면 무엇이 좋을까?” 이 물음 앞에서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아 살라는 ‘칸트’의 말은 내 물음과 그 물음으로 친구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때론 부끄럽게 하고 때론 나의 결단을 더 단단하게 한다. “결국 나만 잘되면 그만이야!”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사람은 홀로가 아니다. 외톨이가 아니다. 나는 나다 하면서 또 자기를 의미 있는 전체 속에서 발견을 하고야 안심입명하지, 그렇게 못 산다”라는 ‘함석헌’의 말에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자기 생각을 다잡기도 하고, 선택한 자기 생각에 확신을 더하기도 한다. 선배 혹은 전문 철학자의 이론은, 이렇게 나도 모르게 나름 철학자로 살아가는 나에게 더 현명한 길을 자극하고 다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다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건, 지금까지 나를 돌아보고 다시 결단하게 하는 것, 이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나로 새롭게 태어난다. 어쩌면 이런 과정에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나란 존재는 무너지며 더 지혜로운 이가 되어간다.
철학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 답은 지혜를 사랑함이다. 그러나 그런 개념 하나 머리에 둔다고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개념은 개념일 뿐 삶을 바꿀 힘은 없으니 말이다. 정말 제대로 지혜가 뜻을 품고 나의 삶으로 다가와 나와 하나가 될 때, 철학은 개념의 다발이 아닌 구체적인 힘을 가지고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그 힘은 막강하다. 내 삶을 바꾸고 홀로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더불어 있는 우리를 자극하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그리고 나와 더불어 있는 우리는 더 지혜로운 삶을 일구어 간다.
지혜를 사랑함, 결국 철학이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지혜와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한다. 그렇게 지혜와 온전히 하나 되어 덜 지혜로운 나의 삶은 온전히 더 지혜로운 삶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때 철학은 참뜻을 품고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철학은 이래야 한다.
철학은 똑똑해지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너와 더불어 제대로 우리 속에서 잘 살기 위해, 즉 슬기롭기 위한 궁리다. 결국 그 슬기로운 삶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 주체가 되어 살아야 하는 삶이다. 그러니 철학의 주체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삶을 모르는 어느 철학자가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삶 속 고난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철학 공부, 그건 누군가의 철학을 요약정리 잘 분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삶을 사는 내가 더 지혜롭게 잘 살기 위한 내 삶의 철학, 즉 내 철학을 일구기 위해 공부이고 궁리다. 지금 여기 내가 하려는 철학을 주제로 한 궁리함도 바로 그러하다. 결국 내 삶을 위한 내 철학이고, 또 이 시대 바로 여기, 우리의 고난을 독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나의 궁리이기에 나와 같은 고난으로 아파하는 이에게 참고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적어보는 궁리기도 하다.
앞으로 이 글이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