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철학 다지기
결국 철학은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철학’을 한다. 결국 철학이 사랑하는 ‘지혜’도 행복을 위해 있다. 더불어 사는 까닭 역시 ‘행복’이다. 더불어 행복이 홀로 행복보다 더 행복이기에 더불어 행복을 더 궁리하고 추구하는 거다. 만일 모두가 홀로 나 하나만 남보다 더 좋은 걸 누리기 위해 산다면, 서로의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다툼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잠시 승리자가 되어 산다고 해도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언젠가 나도 패자가 되어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철학이 궁리하는 행복은 참으로 좋은 걸 궁리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 가짜로 좋은 것 혹 거짓으로 좋은 건 우릴 제대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린 항상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따져 묻고 다시 한번 더 우리의 선택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이 과정 자체가 사실 철학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룬 철학의 역사란 것 역시 바로 이러한 궁리와 돌아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게 더 좋은 것인지 제대로 궁리하기 위해 우린 먼저 어느 게 ‘참으로’ 좋은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만일 우리가 추구하는 게 거짓이나 가짜로 좋은 거라면 우린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며 산다 해도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말이다. 여기에서 우린 철학의 주요한 두 분과를 요청하게 된다. 바로 ‘인식론(認識論)’과 ‘존재론(存在論)’이다.
인식론은 ‘앎’에 관한 학문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관하여 알 수 있는지 혹은 알 수 있기나 한 것인지, 인식론은 궁리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참외가 맛나다는 걸 안다고 하자.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혀로 맛본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앎인가 아니면 그의 어머니가 맛난 과일이라 어린 시절부터 심어준 관념의 탓인가? 만일 참외가 맛나다고 한다면,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라면, 왜 참외를 먹지 않은 나라가 더 많으며, 참외를 맛보고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가. 어쩌면 참외가 맛나다는 그 판단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 판단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우리 사회가 만든 집단적 개념화가 만든 무엇 일지도 모른다. 무지개색을 우린 정말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 조선 시대 사람은 무지개를 ‘빨강, 노랑, 파랑, 하양, 검정’으로 봤다. 일곱 색이 아닌 다섯 색이란 말이다. 그들에겐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미국에선 남색을 뺀 여섯 색으로 봤고,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세 색으로 봤다. 이 가운데 정답이 있는가? 아니다. 객관이란 것 역시 사실 사회가 만든 개념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무언가다. 즉 객관에 관한 앎이란 경우에 따라선 나의 주관 밖 객관의 독립된 상태에 관한 앎이 아니라, 공동체란 하나의 거대한 주관 가운데 모두 다 더불어 만든 개념화된 무엇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가운데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인식론은 “참외가 맛나다”는 앎을 두고도 비판적으로 궁리하고 또 돌아본다.
자 그러면 “참외는 맛나다”라는 우리의 앎이 객관에 관한 판단이 아니라, 결국 주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맛’은 객관적 대상이 아닌 주관적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거라면 이게 정말 있기는 한 것인가?
여기에서 우린 ‘존재론’을 요청하게 된다. 존재론은 무엇이 참으로 존재하는가를 궁리한다. ‘노란색’은 참으로 존재하는가? 노란색은 많은 이들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의 객관적 성질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노란색’ 자체는 빛의 특정 파장, 즉 약 570nm에서 590nm 사이의 파장을 지각할 때 뇌에서 생성되는 결과물이다. 우린 노란색이 특정의 모양을 가진 구체적 사물의 성질로 감각하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주관, 즉 뇌 밖의 노란색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 파장이다. 노란색과 초록색의 차이는 서로 다른 파장의 차이다. 감각된 것을 뇌에서 처리하여 노란색이나 초혹색으로 이 둘을 인식하지만,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것으로 뇌 밖엔 우리가 인식하는 노란색과 초록색은 없다. 파장이 있을 뿐이다. 그 파장을 우리 뇌가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만들어낸 거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 객관적인 게 아니라, 주관인 뇌가 능동적으로 만들어낸 게 색이다. 사실 노란색이나 초록색은 구체적 모양의 사물에 녹아든 객관적 성질로 여기는 보통의 사람에게 노란색이나 초록색이 파장이란 건 참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게 사실이다. 서로 대화하면서 우린 비슷한 파장의 무언가를 두고 하나의 명칭을 만들어낸 거다. ‘노란색’ 혹은 ‘초록색’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파장이란 물리적 현실이 있지만, 우리의 삶의 측면에서 보면 뇌가 만든 능동적이고 주관적 결실인 색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실재들이다. 저마다 각자의 뇌에서 작가의 모양으로 인식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살아가면서 우린 서로 대화하고 이 가운데 비슷한 색을 두고 개인의 판단이 아닌 공동체의 판단을 수용하게 된다. 그때 공동체는 하나의 공통된 언어적 틀, 혹은 사고 틀을 두고 서로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은 무지개를 다섯 색으로 봤다. 참 신기하게도 그들은 무지개의 색을 파란색(靑), 하얀색(白), 빨간색(赤), 검은색흑(黑), 노란색(黃)으로 봤다. 신기하게 무지개색에 하얀색과 검은색이 들어있다. 홍난파가 1929년에 작곡한 동요엔 무지개색을 다섯으로 묘사하는 게 이러한 이유다. 미국에선 남색을 빼고 여섯 가지 색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무지개색이 시간과 공간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객관적 존재인 무지개의 차이가 아니라, 그 색을 두고 각각의 공동체가 개념화한 방식의 차이다. 즉 객관적으로 있다는 것, 그것은 사실 객관이 아니라, 공동체의 집단 개념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에 영향을 준 거다. 그렇게 객관은 집단의 주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만들어진 거다. 그러면 묻자. 주관적 존재는 객관적 존재보다 못한 존재인가?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집단의 개념화, 즉 집단 주관의 개념화는 그저 상상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공동체 구성원의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참된 존재다.
참으로 존재한 것, 그것은 객관적인 어떤 고정된 게 아니라, 더불어 있는 모두와 함께 만들어가는 무엇이다. 조선이 아닌 지금 우린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전 세계인과 더불어 무지개를 일곱 색으로 인식한다. 서로의 대화 속에서, 즉 주관과 주관이 만나 대화하여, 그 대화 가운데 일곱 색으로 고정되었고, 그 주관의 노력이 그대로 객관이 되어 버린 거다.
만나고 대화함으로 서로 다른 주관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 새롭게 만들어진 개념은 새로운 객관을 만들어버린 거다. 620nm에서 750nm 사이의 파장으로 존재하는 색에 대해 여러 개인이 서로 만나 대화하며 빨간색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색은 어느 순간 또 다른 맥락에서 만나 대화의 주제가 되며 공산주의를 상징하게 되었다. 620nm에서 750nm 사이의 파장은 공산주의가 된 거다. 그리고 또 다른 맥락에서 620nm에서 750nm 사이의 파장은 2024년 한국에선 보수주의 정당을 의미하게 되었다. 객관인 620nm에서 750nm 사이의 파장은 우리 삶에 큰 힘을 쓰지 못하지만, 그 파장을 두고 서로 대화하며 만들어진 개념화와 그렇게 만들어진 개념의 해석, 즉 정의의 추가를 통하여 쉼 없이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 재탄생한다. 그리고 그런 재탄생의 과정에서 우리의 삶도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윤리학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가의 물음을 두고 궁리한다. 그 물음은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궁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참으로 좋은 건, 객관적인 산물이 아니라, 어떤 조건 속 객관적 상황을 두고 궁리하는 주관의 대화 속에 혹은 주관의 더불어 있음 속에 만들어진 주관의 산물이다. 어느 순간 참으로 좋은 게 어느 순간에서 나쁜 게 된다. 이는 홀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더불어 있음의 조건, 그 조건에 따라 어딘가의 좋음이 어딘가에선 나쁨이 되기도 한다.
‘규리’와 ‘진선’이 하나의 빵을 두고 어떻게 슬기롭게 나누어 먹을지에 관한 참으로 좋은 결과는 ‘규리’와 ‘진선’이 그 선택을 하는 상황에 의존된다. 하나의 빵이란 하나의 공통된 인식이 있지만, 이 공통된 인식은 이 둘이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또 다른 집단의 개념화가 이루어진다. 집에 충분히 먹을 것이 있는 ‘규리’에게 빵은 지금 당장 급한 게 아니라,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먹을 것이 마땅하지 않은 ‘진선’은 지금 당장 배고프지 않아도 그 빵은 그에게 귀한 것이다. 이때 이 둘은 이 하나의 빵을 두고 ‘진선’의 것이란 하나의 집단 개념화를 이루고 이것이 더불어 좋은 것이라 판단하고 이어 실천할 것이다. 그 실천으로 빵은 ‘진선’만의 것이 되었지만, 그 좋음은 더불어 누리게 되는 거다.
인식론은 참된 것을 궁리하게 하고 존재론은 진짜 존재하는 것을 궁리하게 하고 윤리학은 제대로 사는 걸 궁리하게 한다. 결국 이 모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거다. 인식론과 존재론의 편에서 보면 결국 참으로 존재하는 건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그 객관적 사물에 집단 개념화가 이루어져 만들어진 무엇이다. 그것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우리의 윤리적 선택에 큰 영향을 준다. 플라톤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초월의 세상 이데아이고, 그에 따라서 그는 그 초월의 세상을 향하여 사는 걸 행복한 삶의 최선이라 봤다. 나는 다르다. 참으로 있는 건 물리적으로 객관적 세상이지만, 그 객관적 세상이 우리 삶 속 ‘뜻’으로 다가오기 위해선 집단의 개념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집단의 개념화 과정 속에서 마련된 게 우리 삶에 뜻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우린 항상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를 만나 대화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더불어 좋은 게 무엇인지 말이다. 그렇게 대화 중에 서로의 정신 속에 만들어진 집단의 개념화 산물이 각자의 삶과 우리의 삶을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