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철학의 삶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다른 '나'를 생각하다.

철학의 삶, 유대칠의 철학사 강의

by 유대칠 자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서로 다른 진짜 ‘나’를 생각하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나는 학생이다”, “나는 노동자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와 같이 답하곤 합니다. 하지만 철학자는 종종 이 질문을 두고 더 깊이 고민해 들어갑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두 철학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두 철학자는 이 질문에 대해 아주 다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플라톤은 “진짜 나는 내 영혼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은 진짜 내가 아니라, 진짜 나인 영혼이 갇혀 있는 ‘감옥’일 뿐입니다. 마치 죄수가 감옥에 갇혀 자유로운 삶을 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몸속에 갇혀 자신의 본질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본질을 잊어버리니 몸이 원하는 것, 즉 쾌락과 욕망을 좇으며 살아가게 되고, 결국 서로 간에 다툼과 혼란만 불러일으킨다고 플라톤은 보았습니다.


플라톤이 보기에 철학자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철학자는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좋음과 참됨(진리)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감각적인 세계의 유혹에서 벗어나, 이성이 이끄는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곳으로 나아갈 바를 두고 진지하고 궁리하는 이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철학자만이 공동체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습니다. 사람 대부분은 욕망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자기 이익만 따지고 계산합니다. 그래서 국가를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결론입니다. 철학자는 그런 게 진짜 좋은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플라톤이 옳다면, 인간의 몸을 통해 경험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하고, 음악을 듣고 감동하며,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한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짜 나는 내 영혼만이 아니라, 내 몸과 영혼이 결합한 하나의 실체”라고 보았습니다. 영혼만이 진짜 나라고 하면, 결국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덧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행동과 경험은 우리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이데아(이상)를 떠올리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이성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는 곧 정치철학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국가는 철학자가 이끄는 국가입니다. 철학자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므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지혜로운 소수’가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리,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각각의 개인은 감각하는 자기 몸과 이성적으로 사고 하는 이성적 영혼이란 둘로 이루어진 존재이니 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더 현명하고,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결정을 철학자와 같이 소수가 내려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정치적인 동물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그 구성이 각자의 몸으로 경험한 것과 그 경험한 것을 두고 각자의 이성으로 사고한 걸 함부로 무시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순 없단 말이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입헌정체(polity, politeia)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로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살아가는 민주주의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입헌정체란 부유층과 빈민층이 서로 균형을 맞추며, 국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공정한 절차를 거쳐 통치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쉽게 말해, 특정 계층이나 철학자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운영되는 방식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이론적 차이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플라톤이 생각한 철학자 왕의 국가를 하나의 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왕은 배의 선장이고, 그는 바다의 위험과 항로를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배에 탄 사람들은 그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입헌정체는 여러 승무원이 역할을 나누어 조화롭게 운영하는 배와 같습니다. 누군가는 항로를 정하고, 누군가는 돛을 조정하며, 또 누군가는 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합니다. 배를 목접지로 이끄는 데 있어 단 한 사람의 지식과 판단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예로 병원을 봅시다. 플라톤의 철학자 왕이 운영하는 국가는 마치 한 명의 천재적인 의사가 모든 치료를 결정하는 병원과 같습니다. 환자들은 자신의 병을 잘 모르니, 최고의 의사가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헌정체는 여러 의료진이 협력하여 최선의 치료법을 찾는 병원과 같습니다.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연구원, 환자 본인까지도 치료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결국,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는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플라톤은 “사람들 대부분은 욕망에 끌려다니니, 소수의 철학자가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성을 가지고 있으니, 함께 논의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라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체제가 더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요? 철학자가 이끄는 나라가 더 이상적일까요, 아니면 시민들이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나라가 더 바람직할까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이해하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꿔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질 것입니다.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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