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유대칠 2021 01 24
'요강'이 한때는 변을 받는 기구였다. 나의 어린 시절 한옥에서 생활할 때도 나는 요강을 사용했다. 화장실까지의 거리도 멀었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요강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전시용으로 쓰일 때도 있다. 더 이상 요강은 과거와 같지 않다. 같은 이름으로 같은 모양으로 있지만 요강은 더 이상 요강이 아니다. 그러나 요강이다. 그런 것들이 많다. 똥장군도 그렇다. 과거엔 변을 담아 거름으로 쓰기 위해 사용하였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님 댁에 있던 것을 보았고 드물지만 화장실을 퍼 올리는 것을 보았을 때 쓰이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도 종종 장식용으로 사용되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용도로 있지 않다. 더 이상 그런 똥지개는 없지만 여전히 똥지개는 만들어지고 있다. 수가 줄었지만 말이다. 장식용이나 교육용으로 말이다.
하나의 존재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쓰임이 다르다. 더불어 있는 이들의 쓰임에 따라서 하나의 존재는 같은 이름이라도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있게 된다. 엄밀하게 그 정체성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그 이름으로 존재한다.
유명론이람 존재론적 입장이 있다. 유대칠은 사람이다. 정우성은 사람이다. 장동근은 사람이다. 이렇게 서로 조금 다르게 생긴 세 존재에 대하여 하나의 동일한 술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때 이 하나의 동일한 술어는 주어가 대상을 의미하듯이 그렇게 언어적 차원의 존재 이상의 어떤 현실적 존재를 의미할까? 만일 그렇다면 '사람됨'이란 존재론적으로 유의미한 어떤 실재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명론은 이를 거부하고 술어는 그저 마음이 만든 것으로 본다. 즉 세 존재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마음이 만든 하나의 개념일 뿐이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유명론이 한 때는 삼위일체론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세 가지 신, 즉 성자, 성부, 성령에 대하여 신을 하나의 술어로 보면서 그 술어는 개념일 뿐이라 한 것이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단이란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교회란 무엇인가 혹은 신자란 무엇인가라는 신학적 물음에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자 수학적 존재에 대하여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유명론이란 같은 이름으로 사용하지만 언제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용도로 활용된다. 유명론의 쓸모도 이유도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유명론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지금 유명론자들이 의도한 유명론과 오캄의 유명론은 사실 유명론이란 외관은 같지만 그 존재의 이유와 쓸모는 서로 다르다. 요강을 조선 시대 다루는 사람과 지금 다루는 사람이 요강이란 하나의 동일한 대상을 다루지만 그 이유와 쓸모가 서로 다른 것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의 이름이라도 같은 역사 속에 같이 편입하기 힘들다.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세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지금 요강에 사탕을 보관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과 활용의 느낌으로 조선 시대의 요강을 동일 선상에서 다룰 순 없다. 그러나 요강의 객관적 외관을 연구함에 조금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다.
유대칠
2021 0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