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집(我執)

2021 12 29

by 유대칠 자까

아집(我執)

사람은 죽어간다. 매일 조금씩 죽어간다. 어쩔 수 없다. 누구도 죽어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산 사람의 운명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도 매일 변한다. 때론 정(情)이란 이름의 무엇이 되기도 하고, 때론 아예 다른 이를 향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있는 것은 모두 변한다. 있는 지금도 하나로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여럿이 한 자리에 공존해 있다. 두 사람을 동시에 같은 깊이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정말 죽도록 죽고 싶지만 동시에 처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란 법도 없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나누어진 여럿으로 있는 자신을 그냥 두지 않고 항상 한자리에 하나로 모아 묶으려 한다. 변해가는 자신의 마음도 변하지 않게 묶어 두려 한다. 그러니 병(病)이 난다.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있으며 죽어가고 사라지는 것이 ‘나’란 있음의 진짜 모습인데 말이다. 그것이 진짜인데 진짜로 있지 못하도록 하니 병이 난다. 기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진짜가 되어 살지 못하도록 하니 말이다.

‘아집(我執)’은 ‘나’란 실체, 즉 자아(自我)가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 믿고 집착함에서 시작된다. 태어나기 전 ‘원래 없던 것’, 죽으면 당연히 ‘없을 것’을 두고서 영원을 꿈꾸니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늙어가는 나’도 괴롭고 ‘죽어가는 나’도 괴롭다. 그러니 아집을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한다. ‘번뇌’의 시작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있음’이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 ‘없음’이 나의 참모습이다. 없다가 잠시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것이 나란 존재다.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누리든지 결국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우울하게 있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잔 말이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말이다. 굳이 무엇이 되지 못해도 하고 싶다면 욕심 없이 즐기자. 굳이 가지지 못해도 함께 하고 싶다면 욕심 없이 함께하자 욕심 없이 만나고 머물자. 다음에 대한 욕심이 아집이 되고 번뇌가 되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존재가 되게 하자. 다음을 향하여 욕심내고 미련을 가지지 말고 말이다.

스치듯 지나는 모든 인연에 고마워하며 찰나(刹那)의 인연에 욕심 없이 즐기며 모두와 더불어 그렇게 살자. 서로의 아집으로 흩어져 싸우지 말고 그렇게 욕심 없이 더불어 웃으며 살자.

천국을 향한 시선(視線)으로 살아가는 이는 종종 지금 바로 옆자리 자신과 더불어 있는 이의 소중함을 보지 못한다. 천국이란 죽음 이후 세상을 향한 욕심에 그만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화려한 차림으로 높은 곳에 앉아서는 “나누며 잘자” “더불어 있자” 이야기하는 서글픈 짓은 그만두자. 천국을 바라보는 시선, 그 아집으로 살아가는 이처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러지 말자. 때론 이미 사라진 과거에 사로잡혀 지금을 살지 못하는 이도 있다. 과거에 머물고자 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욕심에 지금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지도 말자. 그냥 지금 여기, 미래에 대한 욕심도 과거에 대한 미련도 없이 우주의 작은 먼지와 같이 머물다 사라지자. 지금 여기, 나에게 찾아온 기쁨에 욕심도 미련도 없이 즐기면서 말이다.

2021년 12월 29일

유대칠 씀


20211015_135655.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