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립(假立)
욕심내지 마세요. 이 세상 모두는 결국 사라집니다. ‘영원(永遠)’은 없습니다. 죽어 없어지고 변해 사라집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아픔은 너무나 당연한 바로 이 이치를 부정함에서 시작되는지 모릅니다. 영원, 그런 것은 없으니 가질 수도 없고 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지혜의 시작일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영원한 사랑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 사랑도 변합니다. 그렇게 이별(離別)이 찾아옵니다. 물론 모든 사랑이 이별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은 정(情)이란 이름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첫 순간의 그 마음으로 있진 않습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 죽습니다. 어쩌면 ‘살아감’이란 ‘죽어감’을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건강한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변하지요. 아무리 운동하고 아무리 관리해도 결국 나이 들어감에 따라 약해집니다. 이것이 자연입니다. 자연 말입니다.
‘가립(假立)’이란 ‘임시로 정해둠’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실재하는 ‘실체(實體)’ 혹은 ‘법(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임시로 정해둠’을 두고 부르는 말입니다. 영원한 ‘법’이나 ‘실체’가 아니라, 임시로 정해둠이기에 경우에 따라선 ‘가법(假法)’ 또는 ‘가유(假有)’라고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린 ‘항상 불변(恒常不變)’하는 법, 즉 ‘실법(實法)’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영원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설령 있어도 알 수 없습니다. 있어도 모른다는 말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지요. 즉 우리에게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영원한 실체나 영원한 법, 즉 실유(實有)나 실법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그저 임시로 그리 정해둔 것뿐입니다. 즉 우리에겐 모든 것이 임시로 정해진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원한 것이라 고집합니다. 그 고집이 우리를 거짓의 세상에 살게 합니다. 사실 임시로 정해둔 것인데 그러한 것을 두고 영원한 것이라 고집해 버렸으니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교리도 도덕도 어느 하나 정말 제대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 존재 자체가 ‘가유’입니다. 임시로 있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리석게도 ‘영원’을 바라봅니다. ‘영원’을 고집합니다. 그렇게 ‘영원’을 바라보다 지금 여기 ‘나’를 보지 못할지 모릅니다. ‘나’는 죽어 사라질 존재입니다. 그리고 죽어 사라질 것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죽어 사라질 것’이 ‘죽어 사라질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지혜의 시작일지 모릅니다. ‘나’는 떨어진 낙엽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찰나(刹那)’의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이 기억해야 할 지혜의 시작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21년 12월 31일
유대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