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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03. 2022

양설(兩舌)

양설(兩舌)     

이 사람에게 가서는 저 사람을 조롱하고, 저 사람에게 가서는 이 사람을 조롱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가서는 이 사람의 편이라 하고, 저 사람에게 가서는 저 사람의 편이라 합니다. 결국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모두를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참 나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서는 그의 욕심(慾心)이 정답이라며 그의 욕심을 높이 세웁니다. 그 말에 이 사람은 더욱 단단한 아집(我執)으로 들어갑니다. 저 사람에게 가서도 같은 짓을 합니다. 저 사람도 더욱 단단한 아집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두 아집은 결국 서로의 답이 정답이라며 싸우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이 둘을 이간질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차지해버립니다. 참 나쁜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닌 온전히 자신 자신의 편이기만 한 그런 사람입니다.      

단단한 아집에 사는 이는 누군가를 싸워 이겨 빼앗으려 하고 누군가를 속여 빼앗으려고도 하지만, 다른 이를 이간질하여 서로 다투게 하여 빼앗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이간질하여 서로 다투게 하는 것은 모두가 아집에 가득 차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의 아집으로 살고 저 사람은 저 아집으로 살기에 이 두 아집을 서로 다투어 자신의 것을 차지하려는 또 다른 아집이 가능한 것이죠. 결국 모두가 아집으로 가득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간질로 무엇인가를 얻은 이의 아집도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의 아집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누군가와 다투게 되겠지요.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서로를 이용하고 버리고 취하는 세상 말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지옥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설(兩舌)’이란 것이 있습니다. 남들 사이에 끼여 이간질하고 고자질하는 것을 부르는 말입니다. 자기보다 앞서 보이면 그와 다투는 이에게 혹은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이에게 가 고자질을 합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것은 고자질함으로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힘듬을 보며 즐깁니다. 왠지 이긴 것 같으니 말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다투는 이들 사이에선 여기 가선 이 이야기를 하고 저기 가선 저 이야기를 하며 다툼을 더 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선 좋아합니다. 왠지 그 둘을 이긴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런 사이에 자기가 얻을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참 슬픈 것은 이런 ‘양설’이 ‘삶의 기술’이 되어가는 세상입니다. 남을 이기고 앞서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이간질하고 고자질하며 앞서가는 것도 그렇게 나쁘게 승자가 되는 것도 ‘삶의 기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집이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집으로 가득한 세상, 모두가 자기 욕심으로만 살아가는 세상, 서로가 서로에게 심지어 언젠가는 자기 자신에게 독이 될 이야기로 승자가 되는 것도 ‘삶의 기술’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도 남을 이용하며 이간질하고 고자질하며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남을 이용하고 속이는 것으로 행복해야 할까요? 그런 나쁜 행복으로 우린 살아야 할까요? 어차피 그렇게 속이고 살아도 결국 그 얻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운명입니다. 잊지 맙시다. 그렇게 살아도 우린 무엇도 가지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답일 듯합니다.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되어도 우린 결코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둡시다. 그때 우리의 마음도 서로 속이고 다투는 마구니(魔仇尼, Maguni)의 세상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참 나’의 ‘있는 그대로’를 깨우침으로 ‘아라한(阿羅漢)’의 모습에 조금 더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2022년 1월 3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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