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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07. 2022

견취(見取)

견취(見取)     

거짓을 거짓이라 믿고 말하기 어려울 때, 진리를 거짓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잘못 없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있다. 그들의 그 억울함에 함께 하지 못할 때, 심지어 그 가해자가 나에게 침묵을 대가로 무엇인가를 건넬 때, 그 사악한 거짓을 진리로 믿어 버린다. 그러면 자신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고, 죽은 그들만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잘못해서 그래서 그 잘못의 탓으로 죽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버리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아프고 힘든 이들이 있다. 그들을 아프게 한 이 현실보다 그저 그들의 게으름을 먼저 보는 것이 편하다. 애써 돕지 않아야 할 이유도 생기도 돕지 않아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이유도 생기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것을 진리라고 믿어 버리면 참 편하다. 아픈 사람의 아픔을 보며 더불어 울기보다는 그의 잘못 때문이라 비난해 버리면 참 편하다. 억울하게 아프고 고난 속에 있고 또 죽어가는 이를 보면서 그들의 탓이라 고개 돌리면 참 편하다. 그런데 참 나쁜 편함이다. 자기 아집(我執)에서 만들어진 자기 관념만을 본다. 참 편하지만 참 나쁘다. 거짓도 진리로 믿어 버린다. 참 편하지만 참 나쁘다.     

‘견취(見取)’라는 말이 있다. 그릇된 것을 바른 것이라 집착하는 것이다. 참 나쁜 고집이다. 나쁜 자신을 선한 자신으로 고집한다. 그러면 나쁜 자신이 아프게 하는 자신이 덜 아플 수 있으니 말이다. 차라리 아프고 또 아프고 거짓을 거짓이라 하고 비겁한 자신을 비겁한 사람이라 하자. 적어도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지 못했지만, 그 존재 자체가 거짓이 되진 않을 것이니 말이다. 거짓이 진리가 되는 방법은 고집이 아니라, 뉘우침이다. 자신의 거짓과 위선 그리고 아집을 직시하기 쉽지 않다. 인정하기 쉽지 않다. 그냥 어쩔 수 없었다며, 그것이 최선이라며, 믿는 것이 편하다. 그냥 그들이 나쁘고 나는 최선을 다선 좋은 사람이라 믿으면 편하다. 그런데 그렇게 존재 자체가 거짓이 되어간다. 결국엔 거짓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린단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거짓이 진리가 되는 방법은 고집이 아니다. 뉘우침이다. 아프고 힘들어도 그게 답이다.     

2022년 1월 7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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