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Jan 08. 2022

추중(麤重)

추중(麤重)     

마음의 짐은 몸의 짐이 된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란 곧 몸이다. 마음이 없으면 아픔도 기쁨도 없다. 마음이 그리 느끼는 것이다. 마음의 앎과 몸의 앎이 다르지 않다. 마음에 담긴 모든 것은 몸으로 들어온 것이다. 몸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도 우린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랑도 몸으로 살아갈 때 제대로 안다. 국어사전을 찾아 사랑이란 말의 뜻을 안다고 사랑을 아는 게 아니다. 사랑은 몸으로 사랑이란 삶으로 살아야 안다. 몸으로 사랑이란 삶을 살 때, 마음은 사랑이 된다. 마음이 사랑이 될 때, 몸도 기쁘다. 심장이 뛰고 웃음이 난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다.     

아프고 힘든 세상, 너무 어려서 아프고 힘든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몸이 힘들고 아프니 그 마음이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나이, 병든 부모의 병간호를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이 아프다. 눈물이 난다. 내 몸도 슬픈가 보다. 그들의 그 힘든 삶에 그들의 몸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그 몸의 아픔만큼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플까. 더불어 나누어 들지 못하는 우리가 참 차가운 존재다. 우리 마음이 그리 차갑기에 우리네 얼굴도 때론 참 무섭다. 마음만큼 몸도 차가워지는 모양이다. 그런 몸으로 살아가니 그들의 삶은 더 외롭고 힘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더 아프고 힘들까. 눈에 보이는 그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눈다면 그들의 마음도 조금은 더 힘들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 차가운 손은 그들을 향하지 않고 그저 어찌하면 더 가지고 더 누릴까를 생각한다. 그 차가운 손만큼이나 그 마음도 차가울 것은 뻔하다.      

‘추중(麤重)’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거침과 무거움이란 말이다. 거칠고 무거운 몸의 짐은 그대로 마음의 번뇌(煩惱)가 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은 모두 거칠고 무거운 번뇌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그들의 그 거칠고 무거운 번뇌의 시작은 우리네 차가운 몸과 마음일 것이다. 더불어 나누어 들지 못한 그 거칠고 무거운 짐에 그들의 몸과 마음이 그리도 힘든 번뇌에 살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 생각하면, 그들 번뇌란 병의 세균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저 산 작은 잡초도 이 번뇌는 없다. 흙이 자신을 내어 주고 이슬이 자신을 내어 주며, 부는 바람이 자신을 내어 준다. 숲 속 그 많은 생명이 더불어 나누어 들며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있다. 저 큰 나무가 주인 같아도 그렇지 않다. 저 큰 나무는 어느 새의 집이고 어느 벌레의 집이며, 그 과실은 어느 짐승의 밥이다. 그리고 죽으면 온몸을 거름으로 내어놓는다. 그러니 저 큰 나무도 숲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모두가 더불어 있을 뿐이다. 서로의 거칠고 무거운 존재의 짐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나누어 품고 있는 게다. 그러니 저 작고 작은 잡초라도 거칠고 무거운 번뇌 없이 그저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다 또 다른 무엇이 되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리라.      

2022년 1월 8일

유대칠 씀

매거진의 이전글 악작(惡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