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Jan 09. 2022

악작(惡作)

악작(惡作)     

철학을 하며 산다. 몇 권의 책도 쓰고 몇 권의 논문도 적었다. 거의 20여 년 전, 나의 첫 논문이 학술지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조금 가난하고 힘들어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박사 과정을 다니며 다니던 철학과가 문을 닫았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학과가 문을 닫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서 버려졌다. 자연히 내 철학의 공간은 대학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 밖 세상에서 나는 아주 작디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큰 매력 없는 지방대의 사라진 철학과 출신 30대일 뿐이었다. 단순 노무(勞務)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30대를 살았다. 일을 다니다 교통사고가 나 다리가 부러지고 뇌출혈로 한 달 의식이 없어도 조금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목발을 하고 아르바이트하기 위해 다녔다, 누구 하나 열심히 산다는 이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논문을 적었다. 1년에 한 번은 논문을 적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말이다. 사실 그렇게 두드러진 실력도 아닌데, 어떤 식이든 그 약속은 대부분 지키며 살았다. 그렇게 새벽엔 논문을 적거나 공부를 하고 낮엔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며 살았다. 문 닫은 철학과 출신의 박사 수료생에게 시간강사도 쉽지 않았다. 고마운 선생님의 덕으로 8년간 일주일에 한 강좌 강의하는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그것이 공식적인 내 유일한 직장이었다. 힘겨운 마음에 친구에게 이 아픔을 이야기하면 참 쉽게 이야기했다. 아프고 너무 아파서 아프다는 말을 용기 내어 말했는데 그들에겐 그저 남의 아픔이었다. 이 힘겨움을 해결해 달란 말도 아니고, 돈 빌려 달란 말도 아닌데 말이다. 너무 아프고 아파서 아프단 말을 용기 내어 말한 것인데 나의 아픔은 그냥 그들에겐 남의 아픔이었다.      

‘악작(惡作)’이란 말이 있다. 쉽게 생각하면 후회(後悔)란 말이다. 불가에선 추회(追悔)라고도 한다. 누군가는 오작(惡作)이라고도 한다. 과거 나의 잘못을 돌아보며 그 잘못된 행위를 혐오(嫌惡)함이란 뜻에서 말이다. 철학을 공부하며 살았다. 그것은 잘못된 행위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기에 철학하는 삶을 선택한 나의 과거 행위를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후회의 마음도 없다. 악작의 마음은 없단 말이다. 그저 힘들단 나의 말에 함께 울어준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 앞에선 그냥 마음이 편했다. 이런저런 조건 따지지 않고 그저 같이 울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나의 이 아픔이 그저 홀로 외롭지 않은 아픔이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커피 한 잔을 청했다. 주머니에 돈도 없고 이런저런 핑계로 다음을 기약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 친구는 이 세상에 없다. 사고(事故)로 그 친구는 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가 보고 싶다. 요즘 나는 이런저런 힘든 일에 참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아프다’는 말을 할 곳이 없다. 그냥 혼자 아프며 산다. 커피 한 잔 마시자던 커피 가게를 지나면 그 친구가 생각난다. 그때 그 친구를 만났어야 했다. 후회스럽다. 그렇게 빨리 떠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후회스럽다. 이 후회는 지난 내 잘못에 대한 미움도 있다. 돈이 없어도 그냥 나갔어야 했다. 나가지 않은 나에 대한 미움도 있다. 그러나 ‘그리움’이다. 그 친구가 그립다. 후회스럽다. 나갔어야 했는데 말이다. 지금 나는 홀로 운다. 그러니 더 그립다. 후회스럽다. 또 다른 악작의 시간이 없기 위해, 나도 그 자리가 오면 기꺼이 누군가와 더불어 울어주어야겠다.      

2022년 1월 9일

유대칠 씀

매거진의 이전글 수증(隨增)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