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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10. 2022

수증(隨增)

수증(隨增)     

참으로 차가운 부모 아래 자란 친구가 있었다. 얼마나 차가운지 정말 부모인가 싶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부모 둘도 서로에게 감옥과 같은 존재들이었으니 제대로 부모로 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년이 된 그때까지도 서로 부부로 살기도 힘든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 친구는 너무 어린 나이에 버려지듯 ‘산 부모’와 이별하였다. ‘산 부모’지만 그에겐 ‘죽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미운 마음이 참 깊었다. 그렇게 부모를 미워하는 자신을 두고도 참 힘들어했다. 부모라는 존재이니 말이다. 미워도 정말 너무 미워도 부모라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 친구는 제법 빨리 결혼했다. 외로운 마음에 남보다 조금 빨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빈손으로 시작한 부부이니 어쩌면 그 어려움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거기에 그들 사이 태어난 아이는 많이 아팠다. 태어나자 곧 입원 생활을 시작한 아이였다. 그 이후로도 항상 대학병원을 찾아 관리해야 하는 아이였다. 빈손의 부부는 더욱 힘들어졌다. 여유라곤 없었다. 밤낮없이 그들은 항상 일을 했었다. 그러나 좋아지지 않았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며,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은 막상 통장에 만원도 남지 않은 이에겐 폭력과 같은 말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쉬지 않고 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차가운 부모에게 찾아가 간절히 매달렸지만 역시나 차가웠다.      

차가운 부모의 차가움에서 시작한 마음의 감기는 빈손의 가난한 부부라는 현실이 되었다. 가난한 부부라는 현실은 아픈 아이라는 아픔을 만나 더욱 아프게 되었다. 그렇게 그 친구의 감기는 깊어지고 깊어졌다. 어느 날, 자신의 아이에게 문자 한 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해 버렸다. 나는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 깊고 깊어 죽음에 이른 것이라 믿는다. 그는 마음의 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는 자살(自殺)이 아니라 병사(病死)했단 말이다.     

‘수증(隨增)’이란 말이 있다. 따라서 증가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번뇌는 하나의 번뇌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 번뇌는 다른 번뇌를 부르고 또 스스로 더 깊어진다. 점점 증가한단 말이다. 그렇게 번뇌는 어느 순간 한 존재의 모든 것을 지배(支配)해 버린다. 그러면 그 존재 자체가 아픔이 된다. “번뇌에서 벗어나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쉽지 않다. 이미 깊어진 병으로 죽어가는 이에게 “병에서 벗어나라” 말한다고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그 ‘수증’의 시작, 그 번뇌의 시작, 그 마음의 병의 시작에 그와 더불어 있어 주어야 할 누군가가 세균으로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따스해야 할 부모의 차가움이 그에게 세균이었고, 아파 우는 그와 더불어 울지 못한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세균이었는지 모른다. 이 세균들이 마음의 병을 더욱 깊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수증의 이유이고, 그 마음의 병, 그 병의 세균인지 모른다. 참 무서운 일이다.      

2022년 1월 10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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