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Jan 11. 2022

해태(懈怠)

해태(懈怠)     

‘지옥(地獄)’이란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곳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지은 죄의 값으로 가는 곳이긴 하지만 참 슬프고 잔혹한 곳이다. 누구도 지옥에 가고 싶어 하진 않는다. 반면 ‘극락(極樂)’은 다르다. ‘극락’은 ‘한없는 기쁨’이란 말이다. 좋은 것 말고 나쁜 것은 없는 곳이란 말이다.      

아집(我執)으로 가득 차 살아가면 지옥에 간다. 나의 욕심에 누군가는 아플 것이다. 어쩌면 그 아픔이 나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패배에 웃으며 앞으로 간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패배하기라도 하면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칼을 간다. 그리고 싸우고 이긴다. 그리고 또 싸우고 진다. 그렇게 살아간다.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 마음, 그 마음에 한없이 싸워가며 투사(鬪士)가 되어간다. 그러다 제법 승자의 자리에 오르면 세상을 내려다보며 훈수(訓手)를 두기도 한다. 아프고 힘든 자들의 고통을 거름 삼아 일어난 승리에서 나온 훈수이기에 사실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그저 승자의 여유로움 정도라고 할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 승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법도 그들이 만들고 그 법을 유지하고 적용하는 것도 그들이 하니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제 자신이 자신보다 가진 것 없는 이에게 패배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사회를 살게 된 것이다. 쉽게 자신의 기득권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애써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곤 이제 더 여유롭게 승자의 삶을 즐긴다. 아집 속에서 그 아집으로 단단해져 살아가는 이들의 세상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누군가는 한없이 즐기는 삶의 또 다른 면엔 잔혹한 비극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기 힘든 사회는 가능성만으로 가득한 청년에겐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 가능성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아픔은 더욱더 깊어진다. 결국 이루어지지도 채워지지도 않을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아집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만든 그 아집의 세상은 이렇게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수십에서 수백 원이나 하는 집에서 호화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세상에 자기 집 없이 남의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엄청난 가격의 과외를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면, 스스로 일을 하며 아픈 부모를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누군가에겐 원하는 것이 쉽사리 현실이 된다면, 누군가에게 꿈을 꾼다는 것이 사치인 그러한 세상이다.     

‘해태(懈怠)’라는 말이 있다.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다. ‘게으름’이다. 가진 자의 그 ‘해태’에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성공을 위해 함께 노력하며 아파한 이 땅 수많은 실패와 애씀에 대한 그들의 차가운 게으름에 이곳은 ‘지옥’이 되어 버렸다. 패자에겐 무엇을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지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골목 작디작은 구멍가게의 힘겨운 삶의 애씀마저 막아 버리는 거대한 기업의 차가움은 어찌할 것이며, 차가운 건물주의 그 차가운 임대료는 어찌할 것인가. 더불어 살아야 할 그들의 배신, 그저 자기 삶만 누리며 더불어 애쓴 그 열심에 대한 그들의 그 차가운 해태는 어느 순간 그들의 삶조차 차가운 비극이 되게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이치라 믿는다. 가진 자의 해태, 가진 자의 아집, 이 사회는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지옥에선 그들조차 웃지 못할 것임을 그들이 알기를 바랄 뿐이다.     

2022년 1월 11일

유대칠 씀

매거진의 이전글 망어(妄語)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