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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13. 2022

계집(計執)

계집(計執)     

종교(宗敎)도 철학(哲學)도 멀리서 보면 참으로 고상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렇지 않다. 너무나 많은 이를 죽이도록 만들었고, 또 서로 다투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종교이고 철학이다.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가 곧 죽음과 미움의 이유가 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종교이고 철학이다.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고상해 보이는 ‘잔인한 악마’다.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慈悲)를 이야기한다. 거의 모든 철학이 정의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막상 현실 속에선 저주(咀呪)와 갈등(葛藤)을 만들었다.      

저마다 자기 자신 속 자신의 답만을 정답(正答)이라 고집한다. 그러면서 남의 답은 오답(誤答)이라 확신해버린다. 자신의 답만이 천국으로 가는 정답이고 남의 답은 지옥으로 가는 오답이란 말이다. 이 생각에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들어도 어차피 지옥에 갈 사람이라며 낮추어 들었다. 그러니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서도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다. 마음은 그저 자신의 답 속에서 남의 답을 오답이라 여기는 오만(傲慢) 속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사실 귀조차도 제대로 기울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 답 속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아집(我執)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집이 자연스러운 그런 삶에서 종교가 다르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되고, 철학이 다르면 조롱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종교와 철학은 세상의 독이 되어갔다.      

‘계집(計執)’이란 말이 있다. 있지도 않은 법(法)을 두고 그것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을 두고 부르는 말이다. 모두에게 하나인 그런 법이 있을까? 많은 종교는 자기 자신의 법이 바로 그러한 법이라 고집했다. 그러니 그 고집 속에서 타인의 법은 오답일 뿐이었다. 사라져야 할 그 무엇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생각이란 저마다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지혜(智慧)란 것도 그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니 지혜란 것도 저마다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를 수 있다. 이 땅에서 지혜로운 것이 다른 환경의 다른 곳에선 지혜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니 법도 다르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지구 어느 곳에선 속옷조차 입지 않고 남녀가 서로 웃으며 잘 지낸다. 우리와 너무나 다른 관습과 윤리로 너무나 잘 지낸다. 정말 우리와 너무나 다르지만 너무나 잘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오답이라 할 수 있을까. 수 만 년 이어온 그들의 삶을 과연 누가 오답이라 무시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수 만 년 이어온 그들의 종교와 신앙을 지옥행 오답이라 부를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 어쩌면 종교는 계집 속에서 악마가 되어갔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법을 모두의 법이라 고집하면서 악마가 되어갔는지 모른다. 있지도 않은 법을 두고 있다며 고집하면서 악마가 되어 갔는지 모른다. 서로 무시하고 다투고 죽이게 하는 악마가 되어 갔는지 모른다.      

나와 다른 이는 당연히 나와 다른 답으로 살아간다. 그에겐 그의 길이 있고 나에겐 나의 길이 있다. 더는 악마가 되지 말자.     

2022년 1월 13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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