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Jan 18. 2022

나 없이 나로 산다는 것

유지승의 도덕경 읽기 2022년 1월 17일

7장

하늘과 땅은 긴 시간 오래도록 이어집니다. 하늘과 땅이 그리도 길고 오래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은 나로 살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길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자신을 뒤편에 두지만 반대로 그 자신이 앞서게 되고, 그 자신을 외면하지만 반대로 그 자신을 보존케 됩니다. 왜냐하면 사적인 아집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사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七.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칠.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풀이: 오랜 고전을 읽을 때는 그때의 상황에서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전의 말은 오랜 과거의 말이고 지금 우리의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큰 간격을 기괴한 형이상학적 서술로 채우며 현학적인 자기 자랑을 하는데 사실 그런 고전 읽기는 그저 지적 허영 그 이상이 되지 어렵습니다. 

오랜 과거의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땅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나무를 두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하늘과 땅에 대한 옛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 하늘과 땅은 그들의 눈에 얼마나 광대했을까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대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지금의 과학으론 우주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은 영원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살게 하면서 스스로는 사라지지도 약해지지도 않는 어떤 거대한 신 그 자체로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어찌 하늘과 땅은 저리도 대단한지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은 아집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나’라는 생각이 그 존재를 지배하면 어느 순간 아집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비를 내릴 때도 자신의 이익을 따지겠지요. 땅에서 풀 하나를 낼 때도 자신의 이득을 따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좋은 것만 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요. ‘나’라는 생각이 그 존재를 지배하면 그 ‘나’는 새롭게 역동하는 자신을 막아서기도 합니다. 아집 속에서 어떤 변화도 없이 고정되어 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은 죽어 있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산 것은 역동하며 자신을 쉼 없이 변화시킵니다. 즉 고정된 나, 변하지 않는 나, 아집 속 나는 없단 말입니다. 하늘과 땅은 고집 없이 변합니다. 산도 강도 쉼 없이 변합니다. 그 역동성을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실 비어 있는 그릇입니다. 그 가운데 무엇이 들어와 채워도 굳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웁니다. 어제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아집 없이 있다는 것은 자기 욕심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 욕심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 자연은 하늘과 땅의 그 흐름에 따라서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우주 전체도 사라지겠지요. 그때가 오면 그저 그때의 일을 그냥 하겠지요.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듯이 말이다. 

사실 이 글에서 성인이란 결국 이상적인 정치 권력자입니다. 굳이 그렇게 읽지 말고 더불어 잘 살아가는 사람으로 읽어봅시다. 그 사람은 자기 이기심을 앞자리에 내세우며 살지 않습니다. 앞서서 이끌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기를 위해 남의 시선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되어 결국은 남의 앞에 있어 보이지만 그 영혼은 남의 뒤에서 남의 시선에 종속된 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기려 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 더불어 있는 모두의 뿌리와 같은 자가 된다면, 그들의 거름과 같은 자가 된다면, 눈에 보이기는 뒤에 있어 아예 보이지 않아도 그 마음은 모두와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사사로운 뜻의 그 사사로움은 이미 사라지고 모두 가운데 하나 되어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굳이 말하면 더불어 있음을 향한 사사로움이라고 할까요. 저 작은 잡초의 생명, 그 생명의 가장 앞자리에 하늘과 땅이 있지만 보이기는 가장 뒤에 있는 모습, 그 모습과 같이 앞자리보다 뒤에서 모두와 더불어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참 아름다운 자리에 참 아름답게 있는 것 같습니다. 

나 없이 나로 산다는 것, 오늘 그 아름다움을 생각해 봅니다. 

2022년 1월 17일

유지승 씀

매거진의 이전글 홀로 외로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곳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