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대칠 자까 Jan 25. 2022

택법(擇法)

택법(擇法)     

우리의 마음은 그저 암기(暗記)하여 익히는 힘만 가진 것이 아니다. 사상사(思想史) 가득한 그 많은 철학(哲學)과 신학(神學)은 모두 새롭게 생산된 것이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누군가 일생을 두고 고민하여 능동적으로 만든 것들이 사상사 가득한 철학이고 신학이다. 조선의 성리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은 중국 철학자의 철학은 달달 암기하고 간략하게 요약한 인물이 아니다. 비록 중국 철학자의 철학에 영향을 깊이 받았지만, 그의 시대 그의 고민 속에서 궁리되며 그의 철학으로 능동적으로 만든 철학자다. 철학과 신학의 삶은 그렇게 이루어져 간다. 앞선 답을 궁리하고 수정하고 바꾸고 버리고 채우면서 그렇게 이루어진다. 한때 최선의 답은 다른 시대 또 다른 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답이 요구된 것이다.      

철학, 어느 순간 철학은 누군가의 철학을 치열하게 분석하고 따지는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것이 되었다. 자신이 전공하는 철학자와 신학자의 답만을 정답이라 고집하고 그 정답에 감탄하며 자신이 전공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를 향한 찬양의 소리를 높인다. 마치 그 철학자와 신학자의 사상을 모르면 무척이나 무지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조롱하는 것은 당연한 무엇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전공한 철학자와 신학자의 귀신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 접신(接神) 하려는 것인지, 자신이 전공한 철학자와 신학자를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해 버린다. 그리고 그 철학자와 신학자에 대한 태도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라도 되는 듯이 반응한다.      

접신은 수동적 행위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우고 남으로 자신의 존재를 내어주는 행위다. 결국 철학과 신학에 관한 애씀은 자기 철학과 신학을 만들어가는 여정이어야 한다. 그것 없이 누군가의 사상을 소리치는 일을 두고 철학이나 신학에 관한 애씀이라 하진 않는다. 그것은 철학자의 일이 아니다. 이미 자신이 추종하는 특정 철학자의 철학이 있으니 철학을 한다는 말보다는 그 철학자의 광고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어쩌면 우리 철학과 신학은 이와 같다. 수동적인 존재들이 자기 자신에게 접신 한 철학자와 신학자의 분신(分身)이 되어 자기 답이 답이라며 타인을 조롱하고 있단 말이다.      

‘택법(擇法)’이란 말이 있다. 모든 법을 살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별하는 것 혹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판별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판별된 것 가운데 ‘거짓된 것’과 ‘악한 것’을 버리고 ,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취하는 것이 바로 택법이다. 택법이 되기 위해선 스스로 자기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미 누구의 답이 정답이라 고집하는 이에게 택법은 불가능하다. 이미 어느 철학자와 신학자의 답만을 고집하는 이에게 택법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스스로는 택법이라 해도 사실은 그저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참되고 선한 지혜는 남의 분신이 되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생각의 주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당연함이 아쉬울 때가 있다.     

2022년 1월 25일

유대칠 씀

매거진의 이전글 탐착(耽著)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