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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29. 2022

제대로 슬기로운 삶을 산다는 것

유지승의 도덕경 읽기 2022년 1월 29일



10장 

정신을 하나로 담아 담으면 흩어져 방황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정기를 부드럽게 하면 어린아이와 같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깨끗하게 닦음으로 한 점 티도 없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너의 앎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게 하여 그 섭리를 알고 알릴 수 있을까요?  확실히 알아 그 이치에 통달하여 능히 무엇도 하지 않고도 이룰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낳아 기르지만 이를 소유하지 않고 베풀지만 나서서 드러나려 하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 바로 이를 현덕이라 합니다.

十.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십. 재영백포일, 능무이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척제현람, 능무자호? 애민치국, 능무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생지, 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이현덕.


풀이: 10장은 참 어렵습니다. 한글 번역도 참 다양합니다. 저도 읽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여러 번역을 읽어 봤습니다. 참 다릅니다.  <도덕경>을 깊이 연구한 분들의 생각이 더 바르고 정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냥 저의 삶에서 읽어온 저의 <도덕경>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엉터리라고 번역이고 풀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어찌 보면 저는 <도덕경>이란 언어로 저의 생각을 전하려는 것인지 모르니 말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깨우치고 마을 공부를 깊이 해도 그것을 남을 다스린다면 결국 그 공부한 관념 속으로 사람들을 집어 놓는 것이 됩니다. 옛사람들의 이런저런 관념 속으로 산 사람을 집어 놓는 꼴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관념이란 것이 어쩌면 옛사람들의 언어를 가져다 자기 욕심을 담아내는 것일지 모릅니다. 공자나 주자의 철학을 수단으로 조선의 양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였듯이 말입니다. 즉 그들이 공부한 그것은 결국 자기 아집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종교는 위계의 질서를 마치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말로는 아니라면서 삶으로는 가장 신에 가까운 이를 두고 신과의 거리에 따라서 사람들을 나눕니다. 그 위계의 질서, 그것을 당연시하는 그들의 앎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 신에게 집적 가지 못하고 남성 성직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여성을 온전한 독립된 주체로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의 뜻이라면서 자신들의 아집,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대로 깨우친 이는 앎으로 삶을 구속하며 앎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습니다. 누구를 만나 사귀어도 자신의 관념으로 그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그를 도와도 그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돕는다면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겠지요. 부모 역시 자식을 키우고도 바라지 않습니다. 정치 권력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운행, 천지의 운행, 음과 양의 이치를 깨우쳐도 그 깨우침으로 얻은 자신의 관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욕심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자연의 흐름을 따라갈 뿐입니다. 항상 스스로에게 캐물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나의 욕심이란 티끌로 가려져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누군가를 나의 관념 속 답만이 정답이라며 강요하며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선입견 없이 욕심 없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온전히 진실되게 더불어 있을 수 있고 그때 온전히 하늘의 이치가 그곳에 제대로 구현될 것이라 믿습니다. 

철학을 하면 자기 철학만이 답이라 생각하기 좋습니다. 경계하고 경계해야겠습니다. 신학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살면 자연히 삶의 답을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 좋습니다. 이 역시 경계해야겠습니다. 

무엇을 알아도 그 앎이 모두에게 정답이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캐묻고 캐물으며 그 시간과 공간 속 무엇이 자기 아집 없이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뜻을 이룰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것, 그것이 현덕, 즉 가장 그윽하고 가장 신비로우며 가장 슬기로운 덕이고, 그 현덕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이는 당연히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없을 겁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 주인의 노예가 되어 아픈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모두 하나로 더불어 흩어지지 않고 잘 살겠지요. 

10장 참 어려운 장을 우둔한 머리로 궁리해 보았습니다. 


2022년 1월 29일 

유지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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