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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29. 2022

깨우침의 조건

유지승의 금강경 읽기 2022년 1월 29일

3. 大乘正宗分 대승정종분 - 대승의 바른 법을 말하다.


佛告.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아살 응여시항복기심.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 生實無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2. 대승의 바른 법을 말하였습니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모든 보살은 그 마음을 이와 같이 다스려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일체중생의 생명은 살로 나는 것, 태아로 나는 것, 습기에서 나는 것, 남에 의존하지 않고 절로 태어난 것, 형색이 있는 것 그리고 형색이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그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 이 모두를 저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려 합니다. 이처럼 끝없이 많은 중생의 생사를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 까닭은 만일 보살이 바로 나라는 생각, 그 교만한 생각, 몸이 실제라는 생각,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이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풀이: 저는 불제자가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해도 꼭 한소리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미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공부하니 당신은 불제자라고 말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꼭 가르치려 합니다. 마치 제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질문의 형식을 가지지만 모르는 것을 묻는 질문도 아니고 사실을 말한다지만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앞에 더 높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철학을 사람들에게 강의하며 항상 조심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옆에 있지 더 높이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더 앞에 있을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철학을 하지만 그저 저 하나의 지적 즐거움에 그치고자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저의 철학이 저와 더불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싯다르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알에서 태어난 것, 즉 조류와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 즉 포유류, 그리고 습기에서 태어난 것, 아마 당시의 지식에 따르면 벌레들을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또 한자로 化生, 산스크리트어 본문을 보니 aupapaduka인데, 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절로 태어난 생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당시로는 하늘의 신들과 귀신들 등등이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형색이 있는 것이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며, 형색이 없는 것이란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두고 부르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생각이 있고 없는 모든 것, 또 그 이외 모든 존재하는 것을 다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삿타르다의 마음입니다. 저는 겨우 저와 더불어 있는 사람 정도니 역시 싯다르타의 품이 더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싯다르타는 無餘涅槃(무여열반)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어떤 고뇌도 없이 영원히 평안한 상태에 이름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어려운 것은 왜 그럴까요? 바로 아집 때문입니다. 죽어 사라질 것을 영원한 것이라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 자신이 이미 모두 깨우치고 있다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이 제대로 깨우치지 어렵게 하고 참 열반에 이르기 어렵게 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아집으로 가득하다면 바로 옆에 싯다르타가 와서 이야기를 해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귀의 고막을 울려도 그 마음으로 전해지지 않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 전해지고 들리기 위해 우선 그 아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참 힘들지요. 

그런데 아집이란 그 고집의 종으로 있지 않으면, 우리의 이성은 어렵지 않게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제대로 깨우치면 헛된 아집을 사라질 것이고 쓸데없는 아집이 사라지면 자연히 열반의 길로 걷게 되겠지요. 하지만 아집 속에서 자기 욕심에만 의지해 있다면 바로 옆에 싯다르타가 와서 깊은 지혜의 말을 전해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가의 사상도 철학도 그것을 공부하며 얻게 되는 것을 남의 앞에 서고자 한 적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교만 속에서 남을 함부로 생각한 적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내가 답이라고 이미 깨우친 사람이라 교만 속에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앞서 돌아봅니다. 

그것이 깨우침의 조건이니 말입니다.


2022년 1월 29일

유지승 씀



사진 유대칠 (2022)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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