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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30. 2022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는 지혜

유지승의 장자 읽기 

莊子 外篇 第12篇 天地 第8

장자 외편 제12편 천지 제8     

아무것도 하지 않음(無爲)으로 하는 것이 하늘(天)입니다.      

泰初有無 無有無名

태초유무 무유무명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일지소기 유일이미형     

物得以生 謂之德

물득이생 위지덕     

未形者有分 且然無間 謂之命

미형자유분 차연무간 위지명     

留動而生物 物成生理 謂之形

유동이생물 물성생리 위지형


形體保神 各有儀則 謂之性

형체보신 각유의칙 위지성     

性修反德 德至同於初

성수반덕 덕지동어초     

同乃虛 虛乃大

동내허 허내대     

合喙鳴 喙鳴合 與天地為合

합훼명 훼명합 여천지위합     

其合緡緡 若愚若昏

기합민민 약우약혼     

是謂玄德 同乎大順

시위현덕 동호대순


태초엔 ‘무엇도 아닌 것(無))’으로 있는 것이 있었고, ‘무엇으로 있는 것(有)’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 이름마저도 없었습니다.

‘하나(一)’가 바로 여기에서 생겨 ‘하나’는 있었지만, 그 ‘구체적 모양(形)’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만물이 이 ‘하나’로 인해 생겨났는데 이 작용을 두고 ‘덕(德)’이라 합니다.

아직 그 ‘구체적 모양’은 정해지지 않아 그 나뉘어 있으나 아직 틈이 없는 걸 두고 ‘이름(命)’이라 합니다. 

움직임으로 만물이 생기는데 만물이 이루어 이치(理)가 생긴 것, 이를 두고 ‘구체적 모양’이라 합니다. 

‘구체적 모양’을 가진 것(形體)은 정신을 가지고 각각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규칙을 가지는데 이를 두고 ‘성(性)’이라 합니다. 

‘성’을 닦으면 ‘덕(德)’으로 돌아가면 그 덕은 처음과 같아지게 될 것입니다. 

같아지게 되면 모든 것이 텅 비어 있게 되고, 텅 비어 있게 되면 이는 곧 ‘대(大)’가 될 것입니다.

새의 노래가 합해질 것입니다. 새의 노래가 합해지면 새의 노래가 천지와 합해질 것입니다. 

그 합해진 모습이 어리석고 흐리멍덩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현덕(玄德)’이라 합니다. 더불어 순조롭게 크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풀이: ‘태초(太初)’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아닙니다. 우주의 밖 어떤 초월자가 우주를 창조한 이야기는 아니니 말입니다. 창조주가 없습니다. 그러니 장자는 우주 밖 누군가에게 부탁해 평화를 누릴 필요가 처음부터 없습니다. 그리고 그 태초, 즉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도 아닌 것(無)’이었습니다. ‘없음’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무엇에 집착하고 그것에 의존해 살아가는 게 장자에게는 처음부터 덧없는 일입니다. ‘텅 비어 무엇도 아닌 것(虛無)’, 바로 그것이 어찌 보면 우주의 본모습이니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無)’으로 있다가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하나’가 됩니다. 아직 어떤 ‘구체적 모양(形)’이 없다 해도 말입니다. 모든 구체적인 만물은 바로 이런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그 ‘하나’의 ‘덕(德)’으로 아직 ‘구체적 모습’은 온전하지 않아도 서로 나누어집니다. 아직 그 차이, 즉 틈이 온전히 벌려지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렇게 벌려져 가는 것을 두고 ‘이름’을 가지는 것이라 부릅니다. 이름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의 그 어떤 것은 ‘선명한 무엇’이 됩니다. 이제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이 되면 자기 움직임을 가집니다. 그렇게 움직임으로 구체적 사물이 되고 그렇게 생긴 것은 ‘이치(理)’를 낳습니다. 이를 진정한 의미의 ‘구체적 모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긴 ‘구체적 모양’을 가진 것(形體)은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규칙(則)을 가지고 이를 본성(性)이라 합니다. 그 본성을 잘 간직하면 덕스럽게 되어 처음과 같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무엇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은 아무것이 되거나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어떤 무엇으로도 있지 않아 ‘텅 비어(虛)’ 있습니다. 그렇게 ‘텅 비어 있는 것’은 무한한 힘의 공간이기에 한없이 크다(大) 하겠습니다.     

새가 저마다 노래하면 하나로 합하지 못합니다. 자기 욕심 버리고 하나로 합해 부르면 이는 마치 천지와 합일되는 것과 같습니다. 흩어져있지 않고 각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큰 하나가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로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단계가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게 되니 말입니다. 이처럼 천지와 하나 되어 있으면 남에게 뒤처져 보여 어리석고 흐리멍덩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이 현덕(玄德)입니다. 가장 높고 높은 지혜의 덕입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규정하여 드러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우주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 처음과 같이 살아가는 그런 삶이란 말입니다. <도덕경> 20장에 생각납니다. “세상 사람 모두 밝은데 나만 홀로 어둡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석습니다(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라는 그 구절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무것도 행하지도 드러내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가는 게 참으로 현명한 현덕(賢德)이며 그윽한 현덕(玄德)입니다.        


유지승 옮기고 풀이

2022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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