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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02. 2022

도사의 삶을 생각한다

유지승의 장자 읽기 2022년 2월 1일

莊子 內篇 第6篇 大宗師 第1

장자 내면 제6장 대종사 제1 


夫道 有情有信 無為無形

부도 유정유신 무위무형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가전이불가수 가득이불가견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자본자근 미유천지 자고이고존     

神鬼神帝 生天生地

신귀신제 생천생지     

在太極之先而不為高

재태극지선이불위고     

在六極之下而不為深

재육극지하이불위심     

先天地生而不為久

선천지생이불위구     

長於上古而不為老

장어상고이불위로     

豨韋氏得之 以挈天地

시위씨득지 이설천지     

伏犧氏得之 以襲氣母

복희씨득지 이습기모     

維斗得之 終古不忒

유두득지 종고불특     

日月得之 終古不息

일월득지 종고불식     

堪坏得之 以襲崑崙

감배득지 이습곤륜     

馮夷得之 以遊大川

풍이득지 이유대천     

肩吾得之 以處太山

견오득지 이처태산     

黃帝得之 以登雲天

황제득지 이등운천     

顓頊得之 以處玄宮

전욱득지 이처현궁     

禺強得之 立乎北極

우강득지 입호북극     

西王母得之 坐乎少廣

서왕모득지 좌호소광     

莫知其始 莫知其終

막지기시 막지기종     

彭祖得之 上及有虞 下及五伯

팽조득지 상급유우 하급오패     

傅說得之 以相武丁 奄有天下

부열득지 이상무정 엄유천하     

乘東維 騎箕尾 而比於列星

승동유 기기미 이비어열성


‘도(道)’ 있다는 정황과 믿음은 있지만 그 행위와 구체적 모양은 없습니다. 

전해 볼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으며, 터득할 순 있다지만 그 모양을 볼 순 없습니다. 

그 자체로 모든 것의 뿌리가 되고 그 자체로 모든 것의 시작이기에 아직 전치가 있기 전에 그 자체로 엄연히 있어 온 것입니다. 

귀신을 신령하게 하고 상제도 신령하게 하며 하늘을 낳고 땅을 낳았습니다.

태극(太極)보다 앞서 있다지만 자신이 더 높다 나서지 않았습니다. 

육극(六極)의 아래 있다지만 더 깊다며 나서지 않았습니다.

천지보다 전에 생겼다지만 더 오래다 나서지 않았습니다.

상고(上古)보다 오래 다지만 더 늙었다며 나서지 않았습니다.

시위씨(狶韋氏)는 바로 그것을 얻어서 천지를 손에 쥐었으며,

복희씨(伏戲氏)는 그것을 얻어서 기(氣)의 근원을 취했습니다.

북두성(北斗星)은 그것을 얻어서 영원토록 어긋나지 않으며,

일월(日月)은 그것을 얻어서 영원토록 쉬지 않게 되었습니다.

감배(堪坏)는 그것을 얻어서 곤륜산을 받아들였으며,

풍이(馮夷)는 그것을 얻어서 황하에서 노닐었고,

견오(肩吾)는 그것을 얻어서 태산에 머물렀습니다.

황제(黃帝)는 그것을 얻어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으며,

전욱(顓頊)은 그것을 얻어서 현궁(玄宮)에 살았고,

우강(禺强)은 그것을 얻어서 북극의 바다에 살았습니다.

서왕모(西王母)는 그것을 얻어서 소광산(小廣山)에 앉아 살았는데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팽조(彭祖)는 그것을 얻어서 유우씨(有虞氏)에게서 오패(五覇)의 시대까지 살았습니다.

부열(傅說)은 그것을 얻어서 무정(武丁)을 도와 천하를 관장하였고 죽어서는 동유성(東維星)과 기성(箕星) 그리고 미성(尾星)을 타고 올라 열성(列星)과 나란하게 되었습니다.     


 풀이: 도사(道士)를 생각해 봅니다. 도사는 어떤 사람일까요? 점(占)을 쳐 미래를 예언하고 어떻게 하면 왕이 될지를 알려주는 사람일까요? 긴 머리에 남들과 다른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기괴한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만화 속 머털도사와 같이 이런저런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일까요? 사실 제가 생각하는 도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빈 그릇과 같이 자신을 비우며 결국엔 자신이 빈 그릇이란 사실 자체도 지우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는 사람이 바로 도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도사가 점으로 미래를 예언하고 왕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하게 숨고 숨어 살면서 모든 이들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게 하는 사람, 자신의 이득이나 자신의 명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도사인데 말입니다. 부적(符籍)을 팔고 이런저런 기복(祈福)을 담은 무엇인가를 판다면 도사가 아닙니다. ‘도사’는 ‘도(道)’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결국은 우주의 ‘도’가 자기 자신의 존재와 합일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부적이나 기복이라니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마치 모두에게 가난을 강조하는 종교가 스스로는 거대한 건물 속 화려한 차림으로 존재하는 꼴이지요. 그 본질과 그 모습이 전혀 조화롭지 못한단 말입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철학자(哲學者)와 신학자(神學者)는 ‘존재하는 모든 것’, ‘무엇으로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 이치를 알아내려 노력했습니다. ‘존재론(存在論)’이니 ‘이학(理學)’이니 ‘도학(道學)’이니 여러 이름으로 참 다양한 답을 많이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질문에 대해 시원한 답을 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있는 것 같은데, 있다고 믿고 있는데, 막상 그 구체적 행위나 모양이 없으니 구체적으로 설명해 낼 수도 없고 교육받거나 할 수도 없습니다. 노자와 장자에 관한 책이 참 많습니다. <도덕경>과 <장자>의 번역과 풀이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었다고 ‘도’를 깨우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노자와 장자의 ‘도’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것일 뿐입니다. 그게 정말 아는 걸까요. ‘창식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참 많이 들은 어머니 친구의 아들입니다. 저는 ‘창식이’라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들어서 마치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고 어느 회사에서 일하고 무슨 일하는 여자와 결혼했으며 그의 아이는 아들인지 딸인지 모두 다 압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창식이’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저는 ‘창식이’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도’도 이와 같습니다. 관련된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여러 학자가 이야기한 ‘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이지 사실 ‘도’를 아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구체화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행위를 하며 “나다!”라고 하지도 않고 구체적 모양으로 “나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자신을 “나다!”라며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도’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다른 것에 의하여 생긴 것은 시작과 끝을 가집니다. 자기 존재를 남에게 의존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도’는 ‘자기 원인(causa sui)’입니다. 자기 존재와 본질을 위해 자기 자신 이외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 때문에 있단 말입니다. 이를 장자는 ‘自本自根(자본자근)’이라 표현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으니 ‘무한’합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어 ‘유한’하지만 ‘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무한한 ‘도’이기에 유한한 모든 것을 품지만 유한한 무엇과 같이 구체적인 무엇으로 있지 않습니다. ‘도’는 ‘귀신’이나 ‘상제’를 신령하게 하는 존재이지만 자신이 그러한 존재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만일 드러낸다면 그 드러냄이란 구체적 무엇 안으로 ‘도’가 구속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속되어 그것으로 자기 본질을 삼으로면 ‘도’도 아집(我執) 속에 있는 게 됩니다. 그러나 ‘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는 만물의 기원(起源)이라며 종종 언급되는 태극(太極)보다 앞서지만, 자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육극(六極)’, 즉 ‘상하동서남북(上下東西南北)’보다 근원적이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가장 오랜 것보다 더 오래되어도 자신의 초월성을 자랑하며 드러내지 않습니다.      

 ‘도’를 깨우치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모든 것을 움직입니다. 그런 ‘도’를 자기 삶으로 구현하는 ‘도사’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며 내세우지 않아도 모든 것을 순조로이 움직이게 합니다. ‘도’는 어느 구체적 장소를 가진 존재도 아니고 구체적 시간에 발현되는 존재도 아니며, 구체적인 누구에게 구체적인 지식이나 이론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즉 ‘도’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과 더불어 있지만, 구체적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숨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숨어 있다고 현실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逃避)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자신을 구체적인 무엇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사’란 이러한 ‘도’가 삶으로 구현된 사람입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하는 사람, 없는 듯이 있는 사람, 쓸모없다 여겨져도 가장 쓸모 있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제대로 우주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 그래서 애써 무엇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참모습에 따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사는 사람.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작은 것을 해도 큰 것을 했다며 자신의 이름을 소리치는 세상, 누구보다 먼저 앞자리에 가려는 세상, 이겨야 인정받는 세상, 이런 세상에 도사의 삶은 참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런데 도사의 삶, 참 부러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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