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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03. 2022

죽음의 참 의미

유지승의 장자 읽기 2022년 2월 3일

莊子 內篇 第6篇 大宗師 第1

장자 내편 제6장 대종사 제1     


죽음의 참 의미     

泉涸 魚相與處於陸

천학 어상여처어륙     

相呴以溼 相濡以沫

상구이습 상유이말     

不如相忘於江湖

불여상망어강호     

與其譽堯而非桀

여기예요이비걸     

不如兩忘而化其道

불여양망이화기도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부대괴재아이형 노아이생     

佚我以老 息我以死

일아이노 식아이사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고선오생자 내소이선오사야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 남아

서로에게 습기를 뿜어주며 서로 거품으로 적셔 주지만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살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요(堯)임금을 찬양하고 걸왕(桀王)을 비난하는 게 

그저 둘 다 잊어버리고 도(道)와 하나 되어 사는 것만 못합니다. 

저 큰 땅은 구체적인 모양을 가진 이 몸을 나에게 주어 이 세상을 살게 하고, 생명을 주어 나를 힘들게 하며 

늙어감으로 나를 편하게 하고 죽어 버림으로 나를 쉬게 합니다. 

그러니 내 삶이 좋은 만큼이나 나의 죽음 또한 좋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풀이: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나 소유라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산다’라는 말이 곧 ‘죽어간다’라는 말인데 말입니다. 종교에 따라, 영원한 신을 믿고 따르면 죽지 않고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말에 지금 바로 이 순간 나의 죽어감을 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 바로 ‘죽음’이며, 바로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삶만큼이나 강인한 그 무엇이 바로 나의 죽음입니다. 내 존재(存在)만큼이나 강인한 진실이 바로 나의 부재(不在)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생명만 봅니다. 영원한 생명만 보며 죽음을 외면합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태어나 늙어가며 죽어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져 가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마름 샘에서 서로에게 습기를 뿜어 힘겹게 산다 해도 사실 물이 풍성한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의 존재를 망각하고 그저 살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생명의 기운 가득한 곳에서 자기 생명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살아가는 게 더 좋다는 말입니다. 요(堯)임금을 높이고 걸왕(桀王)을 낮추는 것보다 이 둘을 잊고 그저 ‘도(道)’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말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살기 위해 협력하고 더 잘 살기 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 평가하며 높이고 낮추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그저 ‘도’에 따라 살아가며 그 ‘도’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편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도’와 하나가 되면 더 생명의 있음과 없음을 두고 집착하지 않고 누가 더 높고 낮은지로 집착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그렇게 집착하고 그 집착으로 애쓰고 다투고 살아가기보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우리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본모습에 충실하면 그것이 가장 좋다는 말입니다. ‘化其道(화기도)’, 즉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변화도 없이 영구히 있을 것이란 집착에서 벗어나 변화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생각하면 생명이란 즉 죽어감과 하나 된다는 걸 깨우치고 살아가는 겁니다. ‘대괴(大塊)’, 즉 큰 땅덩어리, 즉 대지는 그냥 물리적 땅을 이야기하진 않을 것입니다. 바로 우주의 ‘도’일 겁니다. 어떤 이는 이를 조물주 혹은 창조주를 지칭하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자는 창조주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에 내 존재를 걸어야 합니다. 그는 자연을 벗어난 초자연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은 없습니다. 그것은 허상(虛想)입니다. 그 허상을 지우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면 이 몸은 창조주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이치, 우주의 도, 있는 그대로의 우주 그 자체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주가 그러하듯 나고 늙고 죽어가는 게 내 본연(本然)의 모습입니다. 내 ‘참모습’입니다. 그 우주가 구체적인 모양을 가진 이 몸을 나에게 주었고, 그렇게 삶을 시작하게 하였고, 살아감으로 온갖 괴로움으로 나를 힘들게 하였으며, 또 늙어감으로 나를 그 치열한 삶에서 쉬게 하였고, 마침내 죽어 사라짐으로 나를 모든 것에서 해방되게 합니다. 나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아집으로부터도 말입니다.      

 삶도 죽음도 결국 나란 존재가 우주 그 자체의 한 부분으로 있어 일어나는 당연한 그 무엇입니다. ‘더 좋은 것’도 ‘더 나쁜 것’도 사실 없습니다. 그저 우주의 ‘도’와 하나 되어 좋음과 나쁨의 구분도 무의미한 그 상태로 있다가 사라지는 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이 더 좋고 ‘강인한 힘’이 더 좋고 ‘더 많이 소유한 재물’이 더 좋다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를 싸우게 하는 독(毒)입니다. ‘죽음’도 ‘삶’만큼 우리 자신의 참모습이고, 강인함만큼이나 약함도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함 앞에서 우린 항상 헛된 아집에 삶에 집착하고 강인함에 집착하며 더 좋은 걸 두고 남과 다툽니다. 그래 봤자 자의식(自意識) 없이 아무것도 아닌 먼지의 먼지로 사라질 것인데 말입니다. 

     

2022년 2월 3일

유지승 옮기고 풀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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