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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13. 2022

광대하게 시작한 우리 아름답게 사라집시다.

유지승의 주역 읽기 건위천 2022년 2월 13일

01 건위천(乾爲天)     


“하늘은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바릅니다.”

元亨利貞

(건원형리정)     


생각: 하늘이란 그냥 눈으로 보는 하늘은 아닙니다. 물론 그 하늘을 향한 옛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됐지만 지금 그렇게 읽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여기에서 ‘건(乾)’이란 하늘이지만 눈에 보이는 하늘은 아니고 역동적인 원리로 저는 읽습니다. 역동하고 있지만 변하지 않은 그 원리 말입니다. 하늘을 보면 구름 없이 맑은 날도 있고 비와 눈이 오는 날도 있고 바람이 심한 날도 있습니다. 참 다양합니다. 온갖 역동성이 가득 차 있지만, 하늘 그 자체는 그렇게 있습니다. 계절이 변하며 모든 변화를 품고 있지만, 하늘은 그 자체는 그냥 그렇게 있습니다. 하늘이 바람이 되어 사라지지도 않고 눈과 비가 되어 내려 사라지지도 않으며 그렇게 있습니다. 모든 역동성의 공간이지만 그 자체는 모든 것을 숨고 있는 그런 존재란 말입니다. 저에게 하늘은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하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가운데 온갖 변화와 역동을 담아내지만 그리고 정말 그가 품은 그 세상은 그렇게 변했지만, 그는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그 변화를 숨고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말입니다.     


하늘 가운데 일어나는 그 변화를 봅시다. 크고(元) 형통하고(亨) 이롭다가(利) 바릅니다(貞). 한자로 이를 ‘元亨利貞(원형리정)’이라 적고 있습니다. 처음 텅 빈 하늘은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 텅 빈 하늘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무엇입니다. 크죠(元). 그 광대함은 무엇으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기에 무극(無極)의 공간이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작은 씨앗과 같을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긴 작아도 사실 그 씨앗엔 수많은 과실이 담겨있습니다. 그 과실마다 또 수많은 씨앗이 담겨있고 그 씨앗마다 또 수많은 과실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니 씨앗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작은 걸로 보이지만 사실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광대함 가운데 온갖 역동성이 일어납니다. 그 큰 하늘에 가득히 무엇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크게 그 많은 일어남을 움직임과 멈춤이라 부른다면 양(陽)과 음(陰)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형통한 곳, 그곳엔 그렇게 음양의 기운으로 온갖 것이 가득히 채워질 것입니다. 형통하단 말입니다(亨). 씨앗에 싹이 드러나듯이 생명의 기운이 이제 역동하며 드러내는 시기라고 할까요.      


그렇게 역동하면 이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역동은 그냥 무의미한 몸짓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가운데 꽃으로 드러납니다. 보이게도 이롭고 이제 새로운 생명을 품을 자리가 되었으니 이롭습니다(利). ‘무극’의 광대함에서 ‘태극’의 역동성에 이어 이젠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내는 그런 이로움의 자리인 황극(皇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과실의 시간이 옵니다. 씨앗은 싹이 되고 꽃이 되어 과실이 됩니다. 이제 정리하며 다음 새로운 씨앗의 때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라질 때 사라지는 게 바릅니다(貞). 이제 멸극(滅極)의 때가 온 겁니다. 


하늘이 품은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삶과 같아 보입니다. 이제 난자(卵子)와 정자(精子)가 만나 생명이 되어 모태(母胎)에 있는 그 작은 역동성을 생각해 봅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무엇도 아닙니다. 그러니 참으로 큰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아직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엄청난 역동성이 가득 차 있지만, 그 무엇으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한 그러한 시기죠. ‘원’의 시기입니다.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 어느 가정의 ‘누구’가 되어 혹은 어느 사회의 ‘누구’가 되어 살아갑니다. 서서히 그 생명의 역동성은 더불어 있는 것들 가운데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그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웃고 울고 다투고 화해하고 말입니다. ‘형’의 시기입니다. 다음은 그런 시기를 마치고 꽃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듯 자기를 드러냅니다. 자기가 치열하게 역동하던 그 힘겨움이 이젠 자기 존재의 꽃이 되어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리’의 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과실이 되어 사라집니다. 과실은 과실로 영원하면 안 됩니다. 어느 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 동물의 똥이 되어 땅에 떨어져 또 다른 싹이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사라져야 합니다. 사라지는 것이 바릅니다. 그렇게 없던 것이 다시 없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릅니다. 바로 ‘정’의 시기입니다.      


‘점(占)’을 칩니다. 그리고 부적(符籍)을 그립니다. 좋은 일만 가득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나쁜 일을 막아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형’의 시기, 수많은 힘겨움은 오히려 ‘리’의 시기 좋은 꽃이 되는 거름이 됩니다. 피하면 오히려 그 거름이 없어 그 꽃이 약합니다. 당연한 그 꽃의 과실 역시 나약할 것입니다. 그 과실이 품은 씨앗도 힘이 없을 겁니다. 부모가 자녀가 바라는 모든 걸 들어줍니다. 좋은 차도 사줍니다. 기죽지 말라고 말입니다. 좋은 집도 사줍니다. 어깨 펴고 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자녀는 자기 ‘형’의 시기에 스스로 자기 존재를 가득히 채울 역동성의 기회를 빼앗기고 맙니다. 자기 자신의 역동성은 한없이 초라한데 부모가 입힌 화려한 옷으로 자신을 꾸밉니다. 그러니 자신이 결국 부모가 입혀준 그 화려한 옷인 줄 압니다. 재벌과 정치인 자녀의 기괴한 일탈을 기억하시는지요. 마약과 폭력은 어쩌면 그 비워진 공허함을 스스로 채우지 못한 그들의 슬픈 모습일지 모릅니다. 비워진 그 광대함은 스스로의 역동성으로 가득히 채워질 때 제대로 광대한 무엇이 됩니다. 그래야 지만 제대로 싹이 되고 꽃이 되고 과실이 되어 아름답게 사라집니다.      


<주역>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 역동성을 설명하면서 우리 삶의 시작과 마지막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정해진 시간 피할 수 없는 역동성 속에서 울 일 있으면 울고 웃을 일 있으면 웃으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 또 아름답게 사라지라고 말입니다.      


허수 유지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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