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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Jan 28. 2022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이 말이 마음 깊숙이 와닿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부재의 상황뿐이다. 항상 곁에 있어서 인사가 어색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름에 가까울 정도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으로 닿아오는 밤거리를 홀로 걸을 때 가로등 아래 비슷한 인영을 볼 때마다 입 안이 저절로 까끌해진다. 괜히 안녕. 하고 내 과거와 추억에 인사하고 싶어지는 건 나뿐인가 싶다. 안녕. 굴리듯 발음하게 되는 그 한 마디가 어찌나 어색한지. 그래도 용기를 내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며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네본다. 안녕. 잘 지내니.


나는 정해둔 목적지가 없는 긴 여행을 시작했다. 그 어느 곳도 갈 수 있고 내가 원한다면 오랫동안 한 장소에서 머물러도 된다. 아주 자유롭고, 틀이 없는 데다가, 때로는 나를 시험하는 아주 기나긴 항해다. 기나긴 여행자의 삶은 대체로 평안하고 드물게 피곤한 일이 생기곤 한다. 사람이 항상 평탄한 삶만 살 수 없고 너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이상하기에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피로함을 느끼면서도 이 삶도 삶이긴 하다고 느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안정적인 걸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전적이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니. 사람은 왜 이토록 피곤함을 스스로 자처하는지. 가끔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작은 마을이 있을 법한 곳을 지도 위에서 더듬어 보기도 한다. 외지인의 출입을 반가지 않을 곳, 그만큼 때 묻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분위기와 문화가 자리 잡고 있을 만한 곳, 그리고 내가 평생 찾아 헤매어도 내게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곳.


어쩌면 지나간 사랑을 더듬어 본다는 것은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그 장소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약간은 거칠고 군데군데 못이 박힌 낡은 문은 조금만 힘차게 두드리거나 힘주어 밀면 금세 열릴 것 같다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단 한 톨의 진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저 반대편에서 너무도 손쉽게 문을 열고 이곳으로 빠져나왔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양상이다. 너무 오래 지속되어 언제 끝날까 싶었던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봄이 오다 못해 여름으로 접어드는 계절인데 여전히 우리의 관계는 예전에 머물러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조금의 전진도, 후퇴도 없는 채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상태, 서로에게 가까이 갈 생각도 말을 건넬 생각도 없다. 그저 의미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단순히 떠나고 싶지 않은 건지 알 길이 없다. 상대의 마음을 모르는 건 당연한데 이제는 내 마음의 결조차 확신할 수 없다.


가끔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생각만으로도 입 안이 까끌해지는 느낌이지만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또 귀찮다고 햄버거로 자주 끼니를 때우고 있는 건 아닌지, 아직도 아메리카노는 쓰다고 느낄지, 여전히 아침에 누가 깨워줘야만 일어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를 원망하고 있는지. 안부를 물을 수는 없어진 지 오래라 그 질문들은 마음 한편에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를 것 없이 평범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달라진 것은 머리 길이 외에 없다. 나의 서툰 영어로도 업무는 진행되고 있고, 어느 것 하나 익숙지 않아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친절하게 이끌어주는 동료도 있다. 매일같이 새로운 일이 생기면서 플래그가 꽂히고 그것을 쳐내느라 바쁜 일상이다. 아 톱니바퀴 같이 굴러가는 일상이 너무 익숙하고 항상 바빠서 가끔은 내가 아주 긴 여행의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다. 그러다가도 아주 가끔, 문득 잊고 있던 추억이 떠오를 때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컴퓨터 화면만 꼼짝없이 쳐다보게 된다. 점점 멀어지는 기억들과 반비례해서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기만 한다.


정말 이상하지. 너를 떠올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함께했던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게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게. 불과 몇 년 전인데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 무드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장소를, 지금의 순간들을 더욱더 실감 나게 해 준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예정이고 너는 아마 아직도 그곳에서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달이 지구를 따라 공전하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우리는 평생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두고 서로를 축 삼아 빙글빙글 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와 같기를 바란다.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더 이상 애달파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평행으로 달릴지 라도 축이 기울면 언젠가는 우리도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맞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은 아마 이 긴 여행의 끝이 되겠지. 기약 없는 미래를 기다리며. 너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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