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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Jan 26. 2022

엄마에 대하여: 나의 작은 영웅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단 두 글자에도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엄마에게 가지는 내 감정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다. 우리 가족은 연일 매스컴에서 강조하고 떠들어대는 (그리고 어디서 비롯됐는지 이해 가지 않으면서도 그 맥락을 너무 알 것 같아서 모순적인) 이른바 아주 보통이고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인, 부부와 딸 하나 아들 하나로 구성된 4인 가구다. 남동생과 나는 두 살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 장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많은 책임과 의무를 동반한다. 지금은 친구처럼 지내지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부모님을 굉장히 무서워했다. 예의범절을 중요시하고 무척이나 엄격했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칭찬보다는 꾸중이나, 하지 말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격했던 훈육에 일정 부분 감사하는 부분도 있지만 사실 나는 부모님의 훈육방식이 썩 좋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늘 일과 육아로 바빴고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마도, 성실하기만 한 아빠를 만나서 함께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기대는 무척이나 높았고 나는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엄마가 공부를 봐줄 때마다 모르다고 말하기 무서울 정도로 엄마는 엄격했고 내가 도달해야 하는 기준은 까마득해 보이기만 했었다. 엄마한테도 고백한 적 있지만 어린 마음에 그런 엄마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고 가끔 보는 고모나 이모를 더 좋아했었다.


사실 나는 엄마에게 첫째 딸이었지만 엄마에게도 나는 첫 아이라 엄마도 육아는 처음이었을 테고 그래서 아마도 서툴렀던 부분이 많지 않았나 짐작한다. 첫 딸이기 때문에 기대도 컸고, 해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 시키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엄마는 무조건 학원을 보내는 타입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까지 우리 남매는 취미 활동을 제외한다면 학원에 간 적이 없다. 대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서 책을 많이 읽었다. 자유 시간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동생과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고,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의미였다. 동생과 고작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나는 장녀이자 누나이기 때문에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돌봐야 했다. 이 년 차이가 뭐 그렇게 대단한가 싶었지만 그렇게 하는 게 우리 집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동생이 혼나면 나도 혼났지만 내가 혼나도 동생은 혼나지 않았다. 아빠가 동생보다 나에게 약했던 것처럼 엄마는 늘 동생에게 약했고 훨씬 더 부드러웠다.


“엄마는 왜 이렇게 나한테만 뭐라고 해? 쟤한테는 왜 뭐라고 안 해?”

“아이고. 네가 애니?”


꾸중을 들을 때 분에 못 이겨서 결국 툭 내뱉고 말았던 내게 엄마는 네가 더 누난데 애처럼 왜 그러냐는 식으로 말을 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엄마한테 묻고 싶었던 바로 엄마가 가지고 있는 애정의 행방이었다. 사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두드러지게 차별하거나 애정을 선별적으로 나눠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내게 동생에게 더 자주 관대함을 보여주는 엄마를 보면서 차별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엄마의 행동에는 아마 막내라는 포지션과 더불어 엄마에게 특히나 곰살맞게 구는 동생의 성격적인 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십 대 시절의 나는 항상 부모님께 불만이 많았다. 고작 두 살 차이인데 동생을 챙겨야 하는 것도 지긋지긋했고 뭐든 함께 해줘야 하고,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것도 싫었다. 거기에 나는 항상 뭐든 잘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부모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 기대는 높았고 나는 늘 거기에 숨이 막혔다. 동생은 가만히 있는데 왜 나만 항상 엄마를 도와줘야 하나 싶었다. 엄마를 도와주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동생은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게 싫었다. 남동생이라 엄마가 저렇게 은근히 차별하나?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들기도 했다. 딸에게 가지는 엄마의 복잡 미묘한 감정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내게는 그저 힘겹기만 했다. 엄마도 내가 처음이라 서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번 서운하게 시작하니 그 마음은 풀릴 줄 모르고 계속 응어리지기만 했다.


“엄마가 좋다고 해서 나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는 아냐. 엄마는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엄마가 너를 왜 몰라?”

“아니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엄마는 내가 지금까지 힘들었던 거 하나도 몰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 엄마는 몰라. 네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참고 참아왔던 마음이 폭발했던 건 지금까지 딱 두 번, 대학 가기 직전과 신입사원 딱지를 간신히 뗐던 오 년 전의 어느 겨울날이다. 대학 가기 전에 폭발했을 때는 악다구니를 쓰면서 엄마에게 그간 서운했던 걸 다 털어놨다. 엄마를 원망하면서 악을 쓰는 내게 엄마는 아주 차분히 대처했다. 소리를 질러놓고 엄마 눈치를 보는 내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하는 엄마 덕분에 풀리다 만 마음은 다시 봉인되어 저 편에 묻혔다. 그리고 오 년 전, 가족 문제가 발단이 돼서 다투게 되면서 엄마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몇 달간이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때 당시의 나는 엄마에게 지쳐있던 상태였다. 딸이라서 당연히 받아줘야 하는 엄마의 감정 기복과 불안감, 내게만 높은 기대, 내가 잘 해내는 건 당연하고 늘 자랑하기 좋은 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엄마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해야 한다는 피로감, 무엇이든 나에게 상담하고 기대는 엄마. 피곤하고 힘든 건 다 나에게 털어놓고 나에게는 감정도 쉽게 드러내 보이면서 동생에게는 섭섭하거나 서운한 일이 있어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엄마. 내가 하는 것들은 모조리 당연하게 생각했던 엄마. 외모에 대해 피곤한 검열자 같던 그 언어와 행동들. 해묵은 불만과 서운한 감정은 끝도 없었고 나는 엄마와 대화하기를 포기해버렸다. 그 와중에도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아무런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분명 아니라고 할 테고 거기서 오는 피로감을 견디느니 그냥 침묵을 택했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정말 그렇게 반응했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그때는 그런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다. 몇 달간의 신경전 끝에 엄마와 화해했고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모순도 이제는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엄마를 받아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 엄마는 반대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부모님 두 분 모두 결혼을 늦게 한 편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학부모 참관 모임을 하게 되면 엄마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엄마들이 전업주부인 경우가 많았고 회사를 다니는 워킹맘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위해 꼬박꼬박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고 녹색 어머니회에도 참여해줬다. 아마 엄마는 그 당시 학부모, 특히나 엄마들에게 당연하게 일이 되던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내게 썩 좋은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게도 늘 선생님께 잘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일과 육아, 살림을 오가며 종횡무진 바쁘던 엄마의 뒷모습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전학을 갔다. 새로 간 학교는 내가 원래 다니던 곳과 너무 달랐다. 친구들도, 학교 분위기도, 담임 선생님까지 적응이 힘들었다. 엄마는 점점 바빠졌고 내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처음으로 학교에 가기 싫었고, 친구들과의 사이는 어색했으며 담임 선생님은 내가 조금만 서툴게 행동하면 넌 서울에서 전학 왔는데 왜 잘하는 게 없냐며 타박하곤 했다. 삼십 대 초반 가량의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엄마를 둔 아이들을 대놓고 편애했다. 그때 부모님이 사업을 시작하신 터라 엄청 바쁘시던 시기였다. 엄마는 예전처럼 학교에 오지 못했고 성적도 고만고만, 조용한 성격에 딱히 선생님한테 살갑게 굴지도 않았던 내게 선생님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으셨고 괜히 꾸중을 듣는 날이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학기말 무렵 통지표에 적나라한 선생님의 코멘트를 받고야 말았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학습 성취력이 떨어지고 딱히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도 없고 너무 내성적이라는 내용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사실 그 통지표를 엄마에게 주기 전까지는 엄마에게도 야단을 맞을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튿날 학교를 가려고 하는 내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딸. 네 가치를 알아봐 주지 못하는 선생님의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어. 공부야 하면 되는 거고 네가 조용한 건 그냥 성격일 뿐이야. 알지?"


엄마는 선생님께 보내는 답안에 아이의 일면은 너무 단편적으로 평가해주지 말라는 말을 썼고 학부모 면담을 할 때 나를 대신해서 분명히 말해주었다. 아이가 잘못한 게 없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학업 성취도는 공부를 하면 올라갈 것이고 초등학교 3학년이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다면 그게 대단한 일이지,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아직까진 없을 수 있다고. '그리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게 문제가 되나요?'라고 묻던 엄마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말에 선생님이 무어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본인의 교육관과 소신을 선생님께 전달하던 엄마. 딸이 상처받을까 노심초사했던 엄마의 마음과 그 짤막한 평가에서 엄마가 느꼈을 속상함 만큼은 선명하게 보인다. 엄마는 내게 있어서 복잡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단단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말해줘서 약 일 년 간 나를 위축시켰던 선생님의 언어나 행동, 그리고 낯선 공간과 관계가 줬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히어로 중 한 명은 단연코 엄마다. 지금까지 늘 내 옆에서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는 나의 가장 보통의 영웅.


엄마와 딸 사이만큼이나 복잡 미묘하고도 모순적인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존재이고,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축하하고 걱정하는 나의 무조건적인 후원자인 동시에 나에게 감정적인 압박감을 제일 많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의 95퍼센트는 애정이기에, 엄마와의 관계는 화해무드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엄마와의 관계에서 단 한 톨의 서운함이나 아쉬움도 없을 날은 오지 않겠지만 나도 엄마에게 완벽한 딸이 아니듯, 엄마도 내게 완벽한 존재일 수는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냥 요즘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하나다. 엄마, 사랑해.


‘엄마에게. 엄마. 카드는 아주 오랜만이지?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네. 벌써 이십몇 년째 맞이하고 있는 크리스마스지만 난 여전히 크리스마스 하면 엄마 산타 아빠 산타가 주던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나. 올해 우리 집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지. 엄마한테도, 나에게도 여러모로 변화가 많았던 해였고. 나는 가끔 우리가 가족이라서 서로에게 아주 큰 힘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이기 때문에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못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무뚝뚝한 성격이라서 늘 표현하지 못하지만 나는 늘 엄마 편이야. 엄마도 아주 잘 알고 있겠지? 곰살맞지 못한 내 성격을 탓하지 마. 안 그렇듯 보이면서도 무뚝뚝한 성격은 엄마한테서 온 거니까. 엄마가 나한테 그랬잖아. 너무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된다고. 엄마가 일하고 있으니까 끼니 걱정은 안 하게 해 주겠다고.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일단은 버텨서 나야말로 엄마한테 너무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어느 때처럼 그래. 꼭 그렇게 해줘.라고 말하겠지. 열심히 해서 그 미래가 빨리 오도록 노력해볼게. 엄마. 최근에 힘들었던 것 때문에 너무 많이 마음 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든 게 금방 좋아질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많은 걸 해결해줄 거고 엄마한테는 내가 있잖아. 엄마가 항상 좋은 생각만 하고 행복하길.’ (2020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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