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페렉 『사물들』을 읽고 (세계사, 허경은 옮김)
칠순의 어머니는 몇 해 전 맥도날드에 들어선 키오스크 앞에서 진땀을 뺐다며 ‘늙어서 이제 햄버거도 못 사 먹겠다.’ 끌탕을 하셨다. 그러나 얼마 전 일본 여행에서 동전을 일일이 계산하는 사람들 앞에서 ‘참 올드하다.’며 느린 일본을 맞뜩잖아 한신다. 투정 부리면서도 빠르게 적응하는 힘. 그 힘이 대한민국을 이렇게 빨리, 잘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전쟁(6.25전쟁)직후엔 나라도, 국민도 가난하기만 했는데 같은 세대 안에서 이렇게 잘살게 되었으니 참 대단한 일 아닌가. 그러나 모든 일엔 음과 양이 함께 하니, 나쁘게 보자면 나라 전체가 졸부라는 소리다. 자고로 돈이란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 붙지 않는 법. 2021년 미국의 한 여론조사 업체가 17개 선진국 성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부분 ‘가족’이라고 답했지만, 한국만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꼽았다고 한다.
‘물질적 풍요’를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는 만연했다. 특히, 학교나 교회처럼 마땅히 그러지 말아야 할 곳에서 더욱 그랬다. 학급 임원이 되면 커텐을 바꾸고 전교 임원이 되면 농구대를 설치했다. 장로가 되면 교회 봉고차를 한 대 들여놓는 것이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암묵적 룰이였다. 그래서 망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학생들은 부드러운 커텐이 장착된 안정된 교실에서 수업을 했고, 농구를 하며 건강해졌고, 봉고에 성도를 실어 나르며 교회는 더욱 부흥했다. 망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물질에 대한 열망이 정당화되고, 그 욕망이 실현되면서 우리는 다 함께 부자가 되었고, 똑똑해졌다. 바라는 대로 다 이루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 우리 것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망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행복이 멀어졌을 뿐이다. 어느새 불안과 초조함만이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느라 아니, 살아내느라 (행복이) 조금 망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이 책을 권한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그 기분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으리라) 이 책은 우리 주변의 온갖 사물들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을 탐구한다. 주인공 실비와 제롬은 순수하기만 했던 10대를 지나 욕망에 눈을 뜬다. 그 욕망은 사물들로부터 그들에게 전염된다. 그들은 갖지 못하는 큰 집과 멋진 물건들, 라이프 스타일을 소망한다. 온갖 광고와 이미지들은 그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돈을 벌고 물건을 사고, 자신을 한껏 꾸며 보지만, 애석하게도 부는 그들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다. 모든 것이 그들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특히 삶 그 자체가. 그들은 삶을 즐기기를 원했지만 그들 주위 어디서나 행복은 소유와 혼동되었다. 그들은 자유롭고 순결하기를 원했지만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아무것도 안겨주지 않았다. 마침내 다른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행해 돌진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마흔 살을 이렇게 종종거리며 살았어도, 실비와 제롬처럼 늘 돈은 부족하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내가 가진 것, 혹은 내가 벌어들이는 것보다 먼저 고지를 선점하고, 조롱한다. ‘몇 년 전이라면 몰라도, 요새 그 정도 돈으로는 어림없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헷갈린다. 그냥 이럭저럭 만족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이를 악물고 더 애써야 하는 건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개정의 개정을 거처 여전히 잘 팔리지만, 여전히 행복은 소유가 아닌, 존재 자체로부터라는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실비와 제롬의 삶을 보더라도 어떤 결론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삶이란 모순덩어리임을 알게 할 뿐이다. 치열한 삶이 싫어 떠난 곳에서는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되고, 좋은 직장을 갖고 돈을 좀 벌어서 먹는 음식은 맛이 없어지는 삶의 모순. ... 배고파야 글을 쓴다는데, 잘 쓰고 싶은데 가난해지기 싫은 삶의 모순. 소박하게 살고 싶은데, 남들보다 적게 가지면 불안에 빠지는 나의 모순. 나는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 그 잡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