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에게 주는 고통의 이유

한강 『소년이 온다』를 읽고. 창비(2024)

by Summer

2024년 10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되는 순간, 나는 기뻤다. 수상 발표 카운트다운까지 하고 있었다. 유난한 관심엔 이유가 있었는데, 몇 해 전 나는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 몇 개월은 ‘직장인들이 색색의 목줄을 매고 줄줄이 앉아 점심 먹는 식당에서 혼자 낮술 먹기’ 같은 일탈을 누리며 킬킬거렸지만, 곧 다 지겨워졌고 유일하게 독서만이 무용한 놀이로 남았다. 매주 참석하는 서평동아리 송도글캠에선 작년부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을 위주로 읽고 쓴다. 다들 문화적 차이와 언어(번역)의 장벽이라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대가의 문장을 해석해 내느라 진땀을 뺀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우리말로 술술술 읽을 수 있다니!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애석하게도 그 기쁨은 곧 사라졌다. 품절대란으로 한 달 가까이 기다려 읽은 그녀의 글은, 처음엔 술술 잘 읽히는 듯했으나, 착각이었다. 그녀의 글이 내게 주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고도 오롯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책을 덮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물론. 이런 느낌이 낯설지 않다. 토니 모리슨을 읽고 흑인 여성의 억압과 희생을 생생히 느끼며 나는 내 일상의 평화로움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내뿜는 자유의 숨결 속에 숨어있는 역사의 투쟁과 헌신의 무게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강 작가의 글은 차원이 다른 고통이다. 그가 우리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사건 당시 발생한 두 소년의 죽음과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계속되는 생존자들의 고통을 다양한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압도적인 폭력’이다. 소설은 악귀에 씐 듯 민간인을 학살하고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는 계엄군과 신군부, 고문 경찰의 모습을 낱낱이 고발한다. 작가는 독자가 이들의 폭력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 자신조차 한 문장을 쓰고 몇 시간을 울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럽게 무고한 희생자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 고통의 타자화를 철저히 불허한다. 그는 고통 속으로 들어갔고, 독자도 마찬가지가 된다.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퍼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 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 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121)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 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133)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치밀한 조사와 취재에 따른 보고이다. 당시 민간인에게 가해진 무자비한 폭력을 목도한 광주의 한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


이 책의 또 다른 고통은 생존자들의 죄책감이다. 살아남은 은숙은 망자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살아간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중략)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그냥 눈 딱 감고 살아주면 안되겄냐. 내가 힘들어서 그런다. 그냥 다 잊어불고 남들같이 대학 가서 네 밥벌이 네가 하고, 좋은 사람 만나 살고.... 그렇게 내 짐을 덜어주면 안되겄냐.(86)


잊으라는 말. 타인들의 무정함과 망각은 희생자와 그 가족을 분노케 한다. 잔혹했던 5월이 지나고 여름 무렵 도청 앞 분수대를 잠가 달라는 부탁에 나이 든 여사무원의 말은 또 다른 칼이 되어 그들에게 꽂혔다. ‘그만 전화해요, 학생. 학생 같은데 맞지요. 물이 나오는 분수대를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해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102)


그러니까,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고통은 ‘잊지 않음’을 위함이다. ‘용서할 수 없음’의 재확인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 덧붙여 ‘이 세상에는 그저 불의가 너무나도 많을 따름이며, 너무 많이 상기하는 것은 사람 속을 훨씬 더 쓰라리게 할 뿐이라는 말을. 따라서 화해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다. 즉 화해하려면 기억이 불완전하고 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수전 손택의 글을 읽고, 비로소 이해가 된다. 한강의 글이 끝까지 고통인 이유는 그녀의 글에는 화해가 없기 때문이다. 르포보다 더 사실적인 기억과 망자에 대한 애도, 그리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양심이라는 가치가 있지만, 화해는 없다. 그것이 역사에 뒤엉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어떤 역사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상처로 남고, 그런 세상을 우리는 살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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