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사라마구 『카인(Caim)』을 읽고. 정영목 옮김. 2009. 해냄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주제 사라마구가 호명될 때, 교황청은 즉각 유감을 표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주제 사라마구는 저서 『예수복음』을 통해 예수에 대한 통념을 의심하고 뒤집는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가 아닌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 잉태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힘은 순진한 청년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당한 일, 한마디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사라마구의 주장은 그러므로, 신은 선하지 않을뿐더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신실한 무신론자다. 죽어서 심판받는 게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신은 인간이 만들어냈기에,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다.’는 말로 무신론자들의 기를 한껏 살려줬다. 이 주저 없는 신실함으로 주제 사라마구는 여러 고초를 겪는다. 포르투갈 정부는 보수주의 집단과 카톨릭의 압력에 굴복했고, 그의 가족은 리스본을 떠나 스페인의 섬 란사로테로 이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거나 느슨해지지 않았다.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출간된 소설 『카인(Caim)』은 구약성서 속 부조리를 낱낱이 파헤치며 신을 조롱한다. 여호와에게 대놓고 ‘개자식’이라고 하니, 신성모독은 확실하다.
만일 정말로 그들이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가 바라지 않았다면
그냥 그 나무를 심지 않거나 다른 곳에 두거나
철조망으로 둘러싸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14)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닮은 꼴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선악을 알게 하는 금지된 과일을 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한번은 들어봤을 성경 속 인류의 시작이다. 인류의 출발과 동시에 시작된 원죄의 굴레.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들었대요? 차라리 만들지를 말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의문이기에 책을 읽는 내내 통쾌함이 솟는다. 나를 대신해 부모님께 대들어 가려운 속을 긁어주는 철없는 동생을 보는 것 같다. 철없는 동생은 구약성서를 뒤집는 질문들을 싣고 질주한다. 운전자는 형제를 죽인 인류의 최초 악인 카인이다. 여호와의 ‘변덕스러움’,‘쪼잔함’,‘사악함’을 마술적 리얼리즘의 양탄자를 타고 시공을 가로지르며 증언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는 순간, 소돔과 고모라의 대학살, 무너진 바벨탑, 고통에 몸부림치는 욥, 여리고성의 함락 등 구약 속 사건사고 현장에 등장하여 여호와의 부조리를 목격한다. 최후의 일격은 노아의 방주. 여호와와 카인의 대격돌.
노아와 그 가족은 어디 있느냐, 여호와가 물었다. 모두 죽었습니다. 카인이 대답했다. 죽어, 그게 무슨 소리냐 죽다니, 어떻게. 음,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익사한 노아를 빼면 모두 내가 죽였습니다.
너는 진실로 카인, 아우를 죽인 그 비열하고 악한 자로구나.
당신만큼 비열하고 악하지는 않습니다. (206)
대학 2학년 나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신 존재 증명’이었다. 그래서 전공에 철학을 추가하여,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는 형이상학을 듣고 기독교 변증서를 끼고 다녔더랬다. 나는 ‘믿음’이라는 푯대에 ‘지성’으로 다다르고 싶었다. 수련회 마지막 날 밤에서 얻는 영적인 무엇보다 근원적인 믿음을 갖고 싶었고, 그것으로 구별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숱한 질문들을 만났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있다면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를 모르고 죽은 한 살배기 기아는 지옥 불에 떨어지나? 도대체 무슨 죄과로? 자신이 주장하는 신념 때문에 벌어지는 종교전쟁과 무고한 희생자들. 세상의 넘쳐나는 부조리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쓸데없이 진지한 나를 두고 엄마는 저러다 이단에 빠지는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 곧 내 최대 관심사는 달라진다. 토익점수, 자소서, 각종 자격증들. 결국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벌 수 있는 인간인가?’라는 것을 깨닫고 ‘신 존재 증명’은 삶의 구호에서 삭제되었다.
그렇다고 신이 내게서 삭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칸트의 밤하늘에 총총한 별과 내 안의 도덕법칙처럼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동시에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불안, 우울, 절망을 안고 서 있다.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신 앞에 선 단독자로. 그리고 위에 제기된 여러 질문들은 두 가지 명제로 해결했다.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여부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죽은 자에게 불어 넣어졌던 숨에 실린 영혼만이 알 수 있으리라. who knows? 질문과 동시에 대답이 되는 말이다.
여전히 새벽기도로 아침을 시작하는 엄마는 이단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은 거두었지만, 걱정을 완전히 거두건 아니다. 엄마에게 나는 냉담자다. ‘기도 밖에 답이 없다. 하나님께 맡겨야지’라는 관성적인 ‘엄마’식의 해결법에 더 이상 논쟁하진 않는다. 다만 아멘하고 뭉갤 뿐이다. 그리곤 생각한다. 나는 다만, 인간으로 오늘 하루 성실하겠다.라고. ‘인간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다.’라는 말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와 같이 뜻도 모르면서 툭하면 탁하고 나오게 외운 성경 요절만큼은 아니더라도 깊이 새기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
주제 사라마구는 신성을 모독했는가? 그래서 그는 죄인인가? 그래서 이 책은 나쁜 책인가? 신성을 모독했다 한들, 신성이란 한낱 인간에 의해 흠집조차 나지 않는 완전함임이 분명하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죽기 직전까지 이토록 신에게 성실했으니 그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의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아, 이런 질문도 의미 없다. 그야말로 Who kn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