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관통하는 글
마흔, 박완서, 말과 글의 힘
이제는 소원해져 더 이상 안부조차 서로 묻지 않는
그 친구와 친해졌던 계기는 박완서였다.
마흔에 등단하셨다는 박완서.
그로 인해 나의 due date은 암묵적으로 마흔으로 미루어져 있었다.
그때는 마흔이 까마득했다.
하루키의 표현대로 21세기라는 것이 실제로 다가와서, 내가 정말 40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어린 시절에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마흔 즈음이면 나의 삶이, 재능이, 나의 소명이나 그 무엇이 조금은 뚜렷해져 있을 거라 믿으며 살아왔다.
실제 마흔의 나는
재능과 소명 그 비슷한 무엇도 성취된 바 없이
여전히 집합 부근에 머물러있다.
집합이라면 너무했나. 인수분해 정도라 해 두 자.
어쨌든 미분과 적분에는 끝내 다다를 수 없을 것만 같다.
때때로 나에게 남겨진 어떤 정보들은
기막힌 타이밍으로 날아와
삶을 관통한다.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되새김하지 않았던
어떤 문장들은 무심결에 떠올라 솟구치는 무언가가 된다.
최근에는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일 뿐이라던 박완서 선생의 말이 그러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참적의 고통 속에서도 글을 써 내려갔다.
한낱 인간으로서는 그저 당해낼 수밖에 없는
생의 무력함 속에서
밑바닥 속에서 찾아낸 단어이기에
더 와닿았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것일 뿐이다.
글과 음악과 작가에 대한 감상으로
새벽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이야기해도
지루한 줄 몰랐던 친구와는
인연이 다하였다.
박완서 선생은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의 말과 글은 남아있다.
그 말과 글이 가진 힘의 크기는
조금도 줄지 않고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