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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03. 2017

비가 온다

마취과 의사, 텐팅 뒤 단상

비가 많이 온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매일 차로 출퇴근을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비상등을 켜고 다녀야 할 만큼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은 1년에 한 번 정도이다. 그렇게 비가 많이 왔다. 가장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순간에.


전화가 왔다. 돌쟁이 아가 응급이 있다고 보고를 받고, 가야 할 상황이면 시간 걸리니까 일찍 전화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한 시간쯤 지난 시간이다.

- 선생님.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니야 이야기해봐
- 애기가 아무리 약을 써도 바이탈이 안 잡힙니다.
-.. 지금 갈게. 근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는데..
- 그때까지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버텨보겠습니다.


'버틴다'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자려고 씻고 누워있다가 주차장까지 가는데 1분도 안 걸린 것 같다. 생각할 틈도 없이 아까 외출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바로 나갔다. 마음이 너무 급했다. 전공의가 다시 전화를 안 해서 더 불안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거겠지. 올림픽대로를 들어가는데 정말 비가 미친 듯이 왔다. 더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모든 문제는 잘 해결되고 수술은 끝났다.
잘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잘 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어렵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니. 언제쯤 다 알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만 이렇게 모를까.

수술 끝나고 붕대를 감는데 갑자기 인공호흡기가 안 걸렸다.
-'튜브가 빠졌나 봐요'
라고 말했는데, 겁주기 위해서 한 말이지 진짜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정말 빠져있었다 ;;
새로 삽관을 하기 위해 튜브를 준비하려고
' 딱딱한 거 넣어도 돼요?' 하고 신경외과 전공의에게 묻자 그가 말했다.
' 오래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나을 겁니다. 아.. 아기 부모님은 얼마나 속상할까요....'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한 가족의 큰 전환점을 타인으로 지켜본다. 무겁고도 무겁다. 피곤한데 잠.. 이 안 온다. 왜 내가 울고 싶지. 생각하다가도 창백한 아가의 얼굴이, 작은 손과 발이 떠오르고 또 무거워진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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