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간송미술관
물려받은 부를 누리는 이는 많지만 그 부로 가치를 지켜낸 이는 많지 않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부자들은 책임보다 권리를 앞세웠다. 간송 전형필은 달랐다. 그는 특권 대신 사명을 택했고, 소유 대신 보존을 선택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부를 사용했는가.”
청자를 사들이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지켜낸 사람. 나라가 제 힘을 잃고 쓰러질 때, 문화라는 마지막 뿌리를 끝내 놓지 않았던 사람.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땅에서 볼 수 없는 유물들이 수두룩했을 것이다.
1906년 종로에서 태어난 전형필은, 종로 4가 상권을 장악했던 증조부의 부를 이은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는 그 재산을 불리는 대신, 무언가를 지키는 데 썼다. 땅이 아니라 정신을, 이익이 아니라 유산을. 간송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문화보국(文化保國)이다. 나라가 국토를 잃었을 때, 그는 문화라는 또 하나의 국토를 지켜냈다.
기와집 스무 채 값이던 국보를 일본인 수장가로부터 지켜낸 일, 일본보다 먼저 훈민정음을 찾아낸 안목, 전쟁이 나자 문화재를 안고 피란을 떠난 이야기까지. 그가 없었다면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없는 유산들을 그의 숨결이 머무는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의 호를 딴 간송미술관은 서울과 대구, 두 도시에 자리하고 있다.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2024년 대구에서 상설미술관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개인 미술관이라고 믿기 어려운 소장 규모와 관람컨디션으로 놀라게 했다. 전시 수준이 국공립급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게 바로 납득되었다. 그 수많은 작품들을 감싸는 전시의 완성도, 조명과 동선은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한 사람의 신념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이 전시보다 먼저 감동으로 다가왔다. 현재 미술관은 간송의 손자가 관장직을 맡아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간송미술관의 역사와 맥이 훼손되지 않고 잘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1만 7천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소장품을 연중 세 차례의 기획 전시로 나누어 선보인다. 회화와 도자, 불상과 전적, 목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을 주제별로 천천히 꺼내 보여준다.
이번 전시 <화조미감>은 꽃과 새, 그 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린 조선 회화의 미감을 한자리에 모았다. 상설 전시로는 산수화와 풍속화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윤용의〈협롱채춘〉에 매료되었다.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
제목부터가 시처럼 아름다워, 그림보다 먼저 입 안에서 맴돌았다. 다른 작품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비해,〈협롱채춘>은 등 돌린 여인의 모습과 비워낸 배경으로 보는 이에게 상상의 여백을 허락했다. 보이지 않는 얼굴 너머의 이야기까지 그림이 아닌 내가 써보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 작품이다.
간송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던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기와집 스무 채 값을 지불하고 우리 품으로 되돌려놓았다. 유려하게 흐르는 S자 곡선, 그 섬세한 고려청자의 정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랜 시간 건너온 은혜처럼 느껴졌다.
화조미감 전의 백미는 단독으로 전시된 김홍도의〈백매〉였다. 새벽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흰 매화가 그림 한가운데 피어 있다. 그 고고하고 청아한 자태는 형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결을 옮겨놓은 듯했다.
김홍도는 풍속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산수, 인물, 화조까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팔방의 화가였다. 조선 후기 사군자에서 중시된 고상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그의 그림에는 감각과 생동, 그리고 시의 숨결이 함께 있었다. 작품의 구성은 대담하되 묘사는 섬세하고 절제되어 있다. 깊이 있지만 결코 무겁지 않은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이번 전시를 보며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김홍도는 그냥 ‘잘 그린다’의 수준이 아니다. 그는 붓 안에 조선의 다양한 삶을 담아냈고, 그 시대 전체를 그림으로 기록해 낸 천재였다. 그의 그림 앞에서, ‘조선의 화가’라는 말조차 그를 온전히 다 담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는 지하 1층 마지막 전시실에서 만난 실감 영상 전시,〈흐름(The Flow)〉이었다. 입구가 눈에 잘 띄지 않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영상 전시라는 이유로 기대를 낮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원형으로 펼쳐진 거대한 스크린에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등장하는 순간, 그 압도적인 스케일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흘러가는 하루와 변화하는 날씨를 배경으로 그림들은 이어졌고, 어떤 해설도 필요 없이 하나의 서사처럼 전개되었다. 전시 공간 역시 인상적이었다. 바닥에 앉도록 설계된 어두운 공간에서, 관객은 오로지 스크린과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되었다. 지금껏 경험한 어떤 디지털 영상보다도 새로웠다. 단순한 기술의 구현이 아니라, 예술적 감각으로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영상 하나만으로도 다시 미술관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깊고도 오래 남는 감동을 받았다.
간송미술관은 지금, 간송의 신념에 조용히 반응하듯 연일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로 가득하다. 2024년 3월 개관 이후, 단 39일 만에 누적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했고, 78일간 총 22만 4천 명이 다녀갔다. 지난해 하루 평균 2,500여 명이 관람했다. 내가 방문한 날도 간신히 표를 구했다. 관람은 예약제로 운영되어 관람컨디션이 아주 쾌적했다.
미술관 주변의 환경도 빼어나다. 대구미술관이 바로 옆에 있어 두 공간을 함께 둘러보기에 좋고, 한적한 길을 따라 걷는 산책도 여유롭다. 전시를 보고 난 뒤, 대구미술관 옆 핸즈카페에서 커피 한 잔까지 더할 수 있다면 그 하루는 예술 안에서 숨을 쉴 것이다.
한 시대를 지키려 했던 사람의 신념이 수많은 발걸음으로 화답받고 있다는 것,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이 또 있을까. 선의는, 결국 선의로 이어져야 한다. 전시회와 더불어 간송이 던진 무엇을 가질 것인지보다 무엇을 지킬 것인지 먼저 묻는 마음도 얻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