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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독의 품격: 가장 조용한 혁신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by 송지영

경주 여행길, SNS에서 핫하다는 신상 카페를 찾았다가 제대로 혼쭐이 났다. 사람에 치이고 기다림에 지쳐, 결국 음료 한 잔도 받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렸다. 무거운 피로감이 몰려오던 그때, 도망치듯 국립경주박물관 안 북쪽, ‘신라천년서고’로 향했다.

번잡함을 지나 막 도착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 극적인 전환 때문이었을까. 마치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리듯, 나는 그 고요에 단숨에 매혹되었다.


서고의 상징처럼 놓인 석등,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통창, 오래된 책에 배어든 종이 냄새. 이곳은 아마도 경주에서 가장 조용하고 사유하기 좋은 장소일 것이다.

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지식의 숲. 오래된 것과 지금 이 순간이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조용히 숨을 고르는 공간. 그날의 진짜 여행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무엇에 마음이 닿는지, 어떤 고요 앞에서 편안해지는 사람인지를 깨닫으며.

서고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작은 신라시대 석등이다. 실내 공간에 돌기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긴장이 흐르는데, 그것은 공간의 품격을 해치기보다 오히려 낯선 여운을 남긴다. 정제된 목조 천장과 부드럽게 퍼지는 햇살, 시간이 쌓인 책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이곳이 단순한 자료실이 아닌 숨 쉬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이곳은 요즘 ‘눕독’(누워서 독서한다는 신조어) 명소로도 입소문이 자자하다. 책상 앞에 반듯이 앉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소파에 몸을 묻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활자가 이불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곳에 소장된 책들은 신라시대의 역사와 유물에 관련된 책이 주를 이루어서 비전공자라면 자신의 책을 가져와 조용히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공부나 문서작업을 하는 사람을 위한 독립된 책상도 마련돼 있다.

신라천년서고는 원래 박물관의 수장고였다. 197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2019년 기능을 상실한 뒤 한동안 방치되었다. 박물관은 ‘폐기’가 아닌 ‘소생’을 택했다.

2022년 12월, 신라의 지식과 기록을 품은 전문 도서관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이듬해 ‘인터내셔널 아키텍처 어워즈 2024’에서 도서관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며 그 변화를 증명해 냈다. 단순한 복원이나 과거의 재현이 아닌, 전통과 현대의 어긋남을 조화롭게 길들인 결과였다.

한옥의 외관과 철근 콘크리트라는 근대적 물성이 공존하는 건물. 거친 골조 위에 얹힌 목재 서가, 따뜻한 조명과 바람의 결이 살아 있는 구조. 이 이질적인 조합은 오히려 공간의 미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고려시대 해인사의 장경판전에서 영감을 얻은 설계는, 책이 단순히 놓이는 대상이 아니라 공간과 함께 호흡한다는 철학을 품고 있다.

서고를 나서면, 전통 기와집 ‘수목당’과 연못 ‘고 청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단정하면서도 빼어난 풍경이 발걸음을 붙든다. 경주박물관은 단지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원을 품은 장소이기도 하다. 넓은 마당 곳곳에 가꿔진 나무와 꽃을 따라 걷다 보면, 그 자체로 훌륭한 산책이 된다.

문득, 사람들이 교토의 정원만큼이나 경주의 정원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토록 섬세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공간이, 멀리 일본까지 가지 않아도 여기, 우리의 땅에도 있다는 것을.

수목당과 고청지 맞은편, 통창으로 햇살이 깊게 드리우는 이디야커피 경주박물관점이 있다.

경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월지차와 수막새 마들렌도 이곳의 작은 즐거움이다. 카페만을 위해 일부러 들러도 아깝지 않을 곳이다.

입구에 있는 신라역사관에서는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금관, 금 허리띠와 꾸미개 같은 신라를 상징하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신라의 원형 기와 '수막새'로 ‘신라의 미소’라 불린다. 경주 톨게이트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도 바로 이 미소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현재 특별전시관에서는 고려 상형청자전이 열리고 있다.

경주의 고요하고도 완숙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나는 주저 없이 국립경주박물관을 추천한다.

고루하다는 선입견을 뒤엎고 눕독 명소와 정원 산책, 역사기행, 그리고 햇살 가득한 뷰맛집 카페까, 이 모든 풍경이 한자리에서 펼쳐진다. 게다가 놀라운 건, 이 모든 경험이 지갑을 열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사실. 아름다움 앞에 가격표가 붙지 않은 곳, 국립경주박물관이다.

경주는 시간을 간직한 도시이지만, 그 시간을 대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섬세하고 우아하게 진화하고 있다. 이날의 경주는, 오래전 시간을 담은 가장 현대적인 초대장을 내게 건넸다.


*관람팁: 주말 박물관은 열려도 천년서고는 휴관입니다. 평일만 운영.

박물관, 천년서고 휴관일 꼭 확인하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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