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몽유재
차를 마시게 된 건 커피와 연관이 깊다. 눈 뜨자마자 아메리카노 한 사발, 점심 식후땡으로 달달한 커피, 오후엔 연하게 한잔 더. 하루 세잔을 마셔도 끄떡없었다. 그러다 언제가부터 잠이 얕아졌다. 잠든 것 같아도 자는 내내 깊지 않았다. 수면을 방해하는 범인으로 커피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속는 셈 치고 며칠 커피를 끊어봤더니 바로 반응이 왔다. 커피를 마신 날과 마시지 않은 날의 잠의 깊이는 분명히 달랐다. 속 쓰림과 간질간질 괴롭히던 목도 편안해졌다. 그렇게 개운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이 일상으로 초대되었다. 카페대신 찻집을 찾게 되는 일도 흔해졌다. 카페 전성시대인만큼 괜찮은 찻집을 만나는 일은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과 같았다.
양산의 '몽유재'는 그렇게 발견한 공간이었다. 양산으로 떠나기 직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몽유재의 첫 타임에 딱 한자리가 비어 운 좋게 예약에 성공했다. 초심자의 행운에 올라탄 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이 고택을 찾았다. 갤러리 공간 뒤에 숨듯 자리한 고풍스러운 고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장님이 직접 방 한 칸을 열어주셨다. 낡은 나무문을 밀자 마당 가득 번진 푸른 잔디에 마음이 느슨해졌다. 삐걱이는 마루와 나무창틀, 시간이 고스란히 배인 방의 공기. 약 200년 전 지어진 청도식 한옥이라고 했다. 경상도의 전통 양식을 따라 낮고 너른 처마, 안정된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마루의 나뭇결과 세월이 켜켜이 쌓인 방의 온기에서 한옥 특유의 우아한 정취가 배어 나왔다. 지방마다 한옥의 개성이 다르다는 것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어디를 가든 그곳의 대표 메뉴를 주문하는 습관대로 몽유재 시그니처를 선택했다. 남편은 청차를 골랐지만, 비 오는 날은 덖은 차가 좋다는 권유로 덖은 차를 맛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 한방차 같은 시그니처 차는 많이 써서 입에 맞지 않았지만 덖은 차의 담백한 풍미는 오래 머물렀다.
뜨끈뜨끈 엉덩이를 지져주는 온돌의 온기에 아침부터 달려온 피로가 풀렸다. 방 안엔 이불이 정갈히 놓여 있었고, 독립 화장실도 있어 숙박이 가능한 곳이었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잔잔히 번지는 가운데, 이따금 무심한 바람이 지나갔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늘 바쁘게 일에 치여 사는 남편이 오랜만에 여유를 즐겼다. 예쁜 카페라고 같이 가도 커피를 원샷 때리는 통에 금세 일어나야 했지만, 이곳에선 두 시간 내내 천천히 즐겼다. 여러 번 우려낼 수 있는 차 덕분에 가능한 여유였다. 책을 펼치고, 멍을 때리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흘러간 시간. 만 원의 호사가 이 정도 값어치를 한다면, 그건 꽤 괜찮은 사치다.
온돌의 훈기가 몸을 가득 채울 때쯤 방을 나셨다. 주변을 산책한 뒤, 차로 5분 거리의 통도사로 향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있어 사찰 안은 준비로 분주했다. 입구부터 압도적인 위용. 괜히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3대 사찰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통도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중심이다. 그래서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사찰을 걷는 경험은 불편함보다 운치가 앞섰다.
양산은 그동안 통도사만 있는 줄로 알았지만, 지금은 연간 300만 명 넘는 관광객이 찾는 경남 대표 여행지다. 한국관광공사 기준 전국 5위, 경남 1위 인기 역사관광지에 이름을 올렸고, 황산공원도 문화관광지 상위권에 들었다. 과거엔 부산과 경주를 잇는 경유지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스스로 머물고 싶은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부산이나 경주 모두 차로 1시간 이내라 연계 코스로도 훌륭하다.
통도사에서 뒤로하고 10분 남짓거리의 평산서점에 들렀다. 독립서점 특유의 정겨움과 소소한 재미가 있다. 읽고 싶은 책과 선물할 책을 고르며 스탬프를 채우는 즐거움을 남겼다. 이런 날의 책 소비는 물건보다 장면을 남긴다.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길, 손만두와 꽈배기를 사 먹으며 다정한 국내 여행의 느긋한 리듬을 만끽했다. 긴 비행도 없고, 복잡한 일정도 없는 소박한 여행.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멈추는 속도에 마음이 맞춰졌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운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채워지는 만족이 있다.
* 고택차실 몽유재는 시설의 보존을 위해 예약제로 운영합니다.
0507-1372-5676 전화로 사전예약후 방문하세요.
https://www.instagram.com/mongyujae_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