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여백서원, 괴테의 집
전영애 교수를 아시나요? 모르신다고요? 어쩌면, 그녀가 번역한 책은 이미 당신 손을 거쳐갔을지도 몰라요... 다시 한번 떠올려보세요.
나도 여백서원을 알기 전에 그녀를 몰랐다. 오래전에 그녀가 번역한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어 놓고도 번역자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바로 <데미안>이다. 그녀는 저명한 독문학자이자 <파우스트>를 비롯한 괴테의 주요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괴테 권위자이다. 이런 공로로 2011년,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았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5월 마지막 주 토요일, 여백서원을 향했다.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전영애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퇴직을 앞두고 삶의 다음 장을 고민하다가, 여주의 허물어진 폐가에 여백서원을 지었다.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기에 은퇴 후에는 글을 쓰면서 문학으로 나누는 삶을 꿈꿨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줄 몰랐어요.”
여백서원을 찾은 이들이 남긴 말이다. 너나없이 숨 가쁘게 달리느라, 주변을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주변과의 비교 속에 스스로를 잃어버리며 살고 있다.
각박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르고 자신도 세상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곳. 느긋하게 저마다의 속도로 책을 읽고 마음이 향하는 문장을 쓸 수 있는 공간. 자연 속에 들어앉은 한옥, 그 안에는 한 폭의 그림처럼 단정하고 아늑한 서재가 '지향하는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듯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빽빽한 책무덤에 공기마저 묵직했고 그윽한 품격이 배어 나왔다. 책상 위엔 이 방의 주인이 정성스레 남긴 원고와 메모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뭉클한 감정이 밀려왔다. 책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그녀의 시간과 인내가 고스란히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서사들이 궁금해서였을까.
발끝에서 천장까지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간에서 그녀는 지금도 괴테 전집을 번역 중이다. 몸을 뉘일 두평만 남기고, 나머지 공간은 모두 책에게 내어준 삶.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매달 마지막 토요일이면 서원의 문은 활짝 열린다.
서원에 이어 어린이 도서관이 들어섰고, 괴테의 집도 지어졌다. 스스로를 ‘7인분의 노비’라 부르며 일해온 한 노작가의 헌신 덕에, 여주의 잠자던 시골 마을은 이제 ‘괴테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깨어나고 있다.
나는 2016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괴테하우스를 방문한 터라 그녀가 세운 한국 괴테의 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하우스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괴테는 자신도 평생 동안 방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황제의 고문관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세계가 얼마나 단단한 기반 위에 세워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담쟁이덩굴과 꽃들로 단정하게 꾸며진 정원은 집의 격을 말해주는 풍경이었다.
전영애 교수의 괴테하우스는 독일풍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1층은 북카페 지관서가, 2층은 괴테 전시관이 있다. 지관서가의 왼편 서가에는 시련을 건너는 지혜가, 오른편 서가에는 현실의 길을 탐구하는 지혜의 책들이 꽂혀 있다.
마침 그녀의 괴테 강연도 열리는 날이라, 직접 괴테의 시와 괴테의 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백발에 청바지를 입고 아이 같은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지브리 영화 속에 나올 것 같은 다정한 이야기 할머니 같았다. 어쩌면 저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나도 그녀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바람이 불듯 일어났다.
그녀는 괴테를 통해 인간이 뜻을 품으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목격했고, 그 깨달음 나누고 싶어 이 거대한 여정을 홀로 시작했다. 그 뜻을 알아본 후원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 괴테마을이 조성되고 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괴테가 남긴 말이다. 어쩌면 내 방황도 오늘에서야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괴테가 나의 답이 되어줄까.
괴테는 26세부터 82세까지 무려 60년에 걸쳐 <파우스트>를 집필했다. 그가 남긴 편지만도 2만 통, 시집은 126권에 달한다. 하지만 문인 괴테는 그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그는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고, 1400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였으며,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다.
전영애 교수가 괴테하우스를 지은 이유는 그의 삶이 지닌 키워드 알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괴테처럼 자신을 잘 키운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사람이 고난을 어떻게 건너고 다시 일어서는가, 그것이 괴테의 집이 품고 있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이곳의 테마는 '극복'이에요. 그 단어로 서가를 채웠어요.”
결국 같은 역경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건너왔는가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녀의 말은 지친 삶에 극복까지 강요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새 문이 열릴 수 있다는 격려와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이어지는 시간, 그녀는 괴테의 시들을 낭독했다. 맑고 단단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음악이었다. 권위자의 깊이 있는 해석까지 더해지자 단어 하나하나가 눈을 뜨듯 살아났다. 독일어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언어였던가. 오랜만에 듣는 진짜 문학수업에 심장이 설렜다. 단숨에 괴테의 시를 더 알고 싶고, 읽고 싶은 급한 마음이 시동을 걸었다.
괴테의 집에는 항상 음악이 흐른다. 강연 전에 소울 합창단의 노래가 공간을 채웠다. 교수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책과 노래가 있는 한, 사람은 나빠지지 않아요."
삶을 풍요롭게 하는 두 축 책과 음악. 음치라 노래는 부르고 싶어도 못 부르지만, 책은 끝까지 곁에 두고 싶다. 언젠가 내 서재도, 그녀의 서재처럼 기품이 깃든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그녀처럼, 얼음도 녹이는 따스한 난로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그 시작으로 그녀의 책을 펼쳤다. 그녀가 옮긴 괴테의 작품들도 천천히 따라 읽어보고 싶어졌다.
오마토. 오월의 마지막 토요일, 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스승 한 분을 만났다. 인생에서 어떤 파도를 만났나보다, 어떻게 그것을 건너왔나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줄, 정말 몰랐어요.” 하는 삶을 살겠다고. 세상의 눈이나 잣대 따위는 뻥 차버리고, 나의 길을 찾아가는 삶.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나누는 삶이 될 거라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나에게 말해줘야지.
# 여백서원은 후원으로 운영되는 인문학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만 전체 오픈합니다.
매달 행사가 다양하게 열리니 페이스북에서 일정 미리 확인하고 방문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