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서울국제도서전
분명 성인 1명이 1년에 종이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했건만, 6월의 코엑스는 그 통계를 비웃듯 열기로 들끓었다. 문이 열리기엔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북적이는 입구는, 콘서트장 입장 대기열을 보는 듯했다. 누군가는 보부상 같은 가방을 어깨에 걸었고, 누군가는 캐리어를 끌며 시작을 기다렸다.
정토출판사 부스의 봉사자로 이른 아침부터 달려온 나는, 줄의 끝을 찾느라 잠시 멍해졌다. 종이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 출판은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줄곧 들어왔지만, 눈앞의 행렬은 그 익숙한 말에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책 축제, 서울국제도서전이 일으킨 질문이다.
올해 도서전은 17개국 535개 출판사가 참여했고, 사전 예매로 15만 장이 개막 전 전량 매진되며 역대급 흥행을 기록했다. 현장판매가 아예 열리지 않아, 티켓이 없어 발걸음을 돌리는 관람객이 많았다. 온라인에 “티켓 구합니다”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왔고 웃돈을 얹은 재판매 게시물도 등장했다.
이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는 늘 그렇듯 새로운 흐름이 있다. 책을 읽는 것이 다시 ‘힙’해진 것이다.
이른바 텍스트 힙(text-hip). 책은 더 이상 지식의 수단만이 아니다. 이제 읽는 행위는 취향이자 태도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가 되었다.
20~30대가 책과 필사노트 구매의 67.7%를 차지하며 새로운 독서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SNS에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라벨을 붙이고, 마음에 남은 문장을 필사하는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퍼포먼스로 올라온다. 진심과 유행이 적당히 섞여있는 지점, 바로 그 위에 독서가 다시 놓이고 있다.
여기에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기폭제가 되었다. 그녀의 책은 66시간 만에 53만 부가 팔렸고, 읽는 일은 다시 뜨거운 이름을 되찾았다. 이 두 흐름이 쌍두마차처럼 서울국제도서전의 열기를 견인하며, ‘표가 없어 못 들어가는 도서전’이라는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그 흐름 위에 올해 도서전은 ‘믿을 구석’이라는 주제를 얹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펼칠 수 있고, 혼란한 시대에도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책. 누군가에겐 쉼터, 누군가에겐 대화 상대, 또 어떤 이에겐 말없이 끌어주는 동아줄 같은 존재이다.
행사장은 도심 한가운데 공개된 큰 서가 같았다. 테마파크처럼 꾸며진 535개의 부스가 저마다의 세계를 개성 있게 풀어냈다. 요즘 출판사들이 이 도서전에 1년을 갈아 넣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책을 사고, 굿즈를 고르고, 북토크와 사인회에 참여하며 책을 경험하는 시간. 서울국제도서전은 이제 보는 전시가 아니라, 사는 축제가 되었다.
북토크 라인업은 문학 콘서트라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하다. 박찬욱, 문형배, 이세돌, 이슬아… 이름 하나하나가 독자의 발길을 이끈다.
나는 정보라, 이슬아 작가님의 북토크를 멀찌감치 서서 지켜봤다. 특히 이슬아 작가에 대한 팬심은 오래되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그녀의 문장을 펼쳤다. 가볍게 시작해 깊숙이 파고드는 그녀의 언어는 단단했고, 유머는 살아 있었으며, 자신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시니컬함, 마음을 건드리는 섬세함, 그리고 무엇보다 말맛이 살아 있는 문장.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전환됐고, 위로받았다.
이번 달 출간된 신간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를 읽고 있는 터라, 그녀를 실제로 본 것만으로도 도서전에 참가한 본전을 찾은 기분이다. 좋아하는 작가를 눈앞에 두는 일은, 처음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나는 듯한 내적 친근감을 불러왔다. 그건 단순히 유명인을 본 감탄과는 다른 종류의 울림이었다. 내 안의 말을 대신 써준 사람, 어떤 날을 건너게 해 준 문장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북토크와 전시, 굿즈와 사인회, 그리고 하루를 통째로 써도 모자랄 부스 투어까지. 서울국제도서전은 감각과 호기심, 그리고 지적인 탐닉을 동시에 끌어당기는 거한 잔치다. 책 몇 권 골라 담았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책들을. 책장을 넘기며 떠오른 얼굴마다, ‘이 책이 당신의 믿는 구석이 되어주기를’ 하는 마음을 함께 얹었다.
집에 와서 내 마음에 오래 남은 책에 관한 구절을 꺼내 읽었다.
“책을 읽으면 번잡하고 소란했던 생각이 진정되고, 고요함과 평정심이 찾아옵니다.
집착과 같이 나를 괴롭혔던 생각에서 괘도 이탈해 떨어져서 나의 생각을 객관화하며 보게 됩니다. 오류도 잡아주고, 새로운 지식도 선물합니다.
오로지 감정적인 해석과 믿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려줍니다.
그러다 보니 책 속이 안식처이자 구원의 도읍이 되었습니다.
불안함이 사라지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책은 인생을 바꾸는 묘약이 아니다. 다만, 흔들리는 나를 멈추게 하고, 과도하게 불안이 깊어지기 전에 평정심을 되찾게 해주는 존재다. 밤이 유난히 긴 날엔 고요한 불빛이 되고, 방향을 잃은 날엔 돌아갈 좌표가 되면서.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동반자가 되어준다. 그 믿을 구석에 기대어, 오늘도 책을 읽는다.
열려라 참깨. 마음의 문이 열리는 주문을 외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