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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과 김춘수

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

by 송지영

어렸을 때 동네 어귀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간판은 초록색 배경에 하얀 눈이 사르르 내리고 있었고, 이름부터가 예술영화 감성 그 자체였다.

문제는 커피숍인지 호프집인지 정체가 모호했다는 점이다. 안은 늘 음침했고, 낮에도 조명이 어두워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운이었다. 당연히 손님은 없었다. 나는, 그 이상한 가게가 우리 동네에 있다는 게 좋았다. 샤갈의 마을엔 진짜 저렇게 눈이 내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중에 김춘수의 <꽃>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 쓸쓸한 카페의 모티브가 마르크 샤갈의 그림이 아니라,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9년에 발표된 이 시는 한국 현대시에 회화적 상상력과 철학적 이미지를 함께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매일 그 가게를 보며 샤갈의 세계를 상상했는데, 알고 보니 그 감성의 주인은 김춘수였다니 웃음이 나온다.

러시아 마을 Russian village, 1929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을 보러 갔다. 이번 전시엔 김춘수가 영감을 얻은 샤갈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무려 제목도, 마을에 내리는 눈도 아닌 <러시아 마을>이었다.

그 맞은편 벽에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는 구절로 유명한,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쓰여 있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샤갈의 그림과, 한국 현대시의 거장 김춘수의 시를 병치시킨 이 큐레이팅은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동시에 어딘가 씁쓸하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혁명과 전쟁, 추방과 망명으로 삶 대부분을 타국에서 떠돌았다. 그가 그린 <러시아 마을>은 고향 비텝스크를 향한 그리움의 결실이다.

이 도시는 모스크바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샤갈은 그곳에서 영혼의 동반자인 벨라 로젠펠트를 만났고, 생애 내내 그곳을 그리워하며 화폭에 수없이 되살려냈다. 그가 그린 집과 굴뚝, 들판과 사람들 속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정념이 배어 있었다.

색채의 마술사라는 이름답게 그의 색은 밝았지만, 어쩐지 쓸쓸했다. 그건 아마도, 그가 품었던 세계가 단지 예쁜 환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샤갈의 그림을 보며 눈 내리는 마을을 떠올린 것도 감상이고, 그 장면을 시로 옮긴 김춘수의 작업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샤갈의 그림 이면에 깃든 유대인의 방랑과 상실, 그리고 시대의 핍박까지 그가 얼마나 감지하고 있었는지는 시를 봐선 모르겠다.

전영애 교수의 책 <인생을 배운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1943년, 나치에 의해 유대 민족 전체가 절멸 위기에 처했을 때,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은 한 사람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면, 누구여야 할지를 놓고 고민한다. 그들은 시인을 살리기로 결정한다. 민족은 사라질지라도,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역사를 기록할 사람 한 명은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택된 이는 카체넬존이라는 시인이었다. 그를 나름 안전한 프랑스 수용소로 보내고 나머지는 죽음을 맞이했다. 카체넬존은 자신이 왜 살아남았는지 기억하며 시를 종이에 쓸 수 없었던 일 년 반 동안, 긴 구성의 시를 암송하며 기억했다. 잠시 종이와 펜을 허락받자, 그는 사흘 동안 여섯 부로 나누어 시를 써 내려갔다. 그중 두 부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시인은 살아남지 못했다. 카체넬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내 목숨을 잃었다. 가죽 가방 손잡이 안에 실로 꿰매 숨기고, 유리병에 담아 나무 아래 묻어두었던 시는 훗날 책으로 출간되었다.

우리에게 윤동주가 있었듯이, 그것이 그 시대 시인의 자리였다. 시를 쓴다는 건 무엇일까. 말이 멈춘 시대에, 말이 되어야 했던 사람이 시인이기도 했다. 김춘수의 후반기 행보는 그래서 더 무거운 질문으로 남는다.

샤갈은 그림으로 떠돌았고, 김춘수는 말보다 존재를 응시했으며, 카체넬존은 죽음 앞에서도 시를 썼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건넜다. 결국, 시든 그림이든, 무엇을 남긴다는 건 어쩌면 끝까지 붙들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지 모른다. 그것이 고향이든, 민족이든 혹은 눈 내리는 마을 같은 오래된 환상이든.

그 마음들이 남긴 무언가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의 그림 앞에 멈춰 서고, 어떤 시 앞에서는 조용히 숨을 고르게 되는 건 아닐까.


샤갈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김춘수를 지나, 카체넬존까지 떠올릴 줄이야. 예술은 그렇게, 때때로 우리를 멀리까지 데려다 놓는다. 덕분에 오래전 기억 속 그 카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도 다시 만났다.


#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

장소: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1F

일시:2025. 9.21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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