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사랑하는 영화 <더리더>의 한 장면. 앞만 보고 가다가 갑자기 뒤돌아볼 일이 생겼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꼼꼼하고, 정리를 잘했다. 나도 그 친구도 각자의 다이어리가 있고, 일기를 썼지만, 매일의 기분만큼 중구난방인 내 다이어리와 달리 그 친구의 다이어리는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이는 게 보였다. 영화, 책 등 여러 개의 리스트가 정리되어 그만의 통계가 됐고, 좋아하는 문장과 대사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적재적소에 써먹었다. 그 점이 참 부러웠다.
나 역시 기록을 즐겨하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소중히 여기지만, 어째선지 나는 영 한곳에 쌓이지가 않았다. 필요할 때 찾아 쓰질 못했다. 내가 기록만큼이나 새 노트를, 새 필기도구를, 새로운 문구를 좋아하는 탓에 중구난방 기록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친구만큼 꾸준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서른이 훌쩍 넘어 우연히, 정말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 친구가 쓴 글을 보게 됐다. (너무나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보게 됐다,는 표현보다 글과 '부딪쳤다'고 표현해야 할 지경이다.) 그는 그때처럼 차곡차곡 기록해둔 자신의 업무 기록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원하는 곳에 이직을 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연락하고 지내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내가 부러워하던 그 장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쓸모 있게 활용하고 있는듯 보였다. 그렇구나, 하고 말았어야 하는데 내 마음의 소리가 불쑥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넌 어때?”
"응, 나도 그대로지^^"
,라고 대답하고 영 마음이 편치 않았던 까닭은, 여전히 메모장을 여러 권 돌려가며 중구난방 기록하고, 그래서 때때로 기록을 찾느라 동분서주하고, 일관성 없는 이 기록습관을 내가 오래전부터 고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로라니 이 사람아! 흐아, 웃음기 가시는 일이었다.
변하지 않았다니,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니. 뭔가 좌절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말인 즉, 나는 40대나 50대가 되어도 노트를 몇 권씩 들고 다니며 열심히 적지만, 제대로 찾지도 써먹지도 못하는 기록 생활을 계속하면서 '내가 이 습관을 참 고치고 싶었는데 허허' 하고 살고 있을 확률이 대단히 높잖아?
갑자기 마음에 파고든 부정적인 기운은 삽시간에 내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점들 때문에 내가 그때 그 실패를 했던 건지도 몰라, 저번에 그 실패를 한 이유도 이런 성격 탓인지도 몰라. 살면서 잘못한 것 같은 일들이 기억 회로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한밤중이었고, 이 모든 생각이 너무나 순식간에 쏟아져서 손쓸 틈 없이 울적해졌다.
"네가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때"
"나 앞으로도 이렇게 살까?" "응, 넌 그렇게 살거야^^^^^"
그리고 며칠 뒤, 다른 친구를 만났을 때 이 마음을 와르르 쏟아냈다. 지혜롭고 냉정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앞으로도 넌 그럴 거야. 그렇게 살 거야.”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나도 꼼꼼하고 꾸준하게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냥 기록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어쩌면 그건 성격 문제야. 난 좀 더 꼼꼼하고 꾸준할 필요가 있어.”
“잘 알고 있네. 그럼 그것도 알겠네. 성격 문제라, 바꾸기 힘들 거라는 걸. 그렇지만 네 다른 성격 덕분에 네가 지금 누린 즐거움이 분명히 있잖아. 꼼꼼하고 꾸준한 것과는 다른 장점들로 얻은 것들이 있잖아.”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내 앞에서 친구가 계속 말했다.
“옛친구는... 나에게 경각심을 주는 존재가 있구나, 고맙구나 하고 가볍게 넘겨. 하지만 알잖아. 네가 그 친구에 대한 질투나 조바심으로 뭔가 노력하고 애써봤자 그것도 오래가지 못할 거야. 넌 그냥 지금처럼 살면 돼. 그렇게 잘 지내다가 정말로 네가 채우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네 스스로 네 안에서 그런 열망이 생기면 그때는 너를 변화시킬 수 있겠지. 네가 필요하면 그땐 네가 하게 될 거야.”
네가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땐 그 일을 하게 될 거야.
그게 무엇이든.
지혜로운 친구의 조언을 들으니 무거운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그의 말이 옳다. 내가 그 밤에 아무리 회개하고 새로 다짐한다고 해봤자 그 다짐 역시 작심삼일이겠지. 지난 밤에는 너무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떠올리지 못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나대로 나의 부족한 점들을 개선해 나가고자 무의식중에(!) 애쓰고 있었다.
'앞으로 하나의 노트만 쓸거야!'라고 대놓고 다짐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기만큼은 진작에 '5년 다이어리'를 사서 채워나가고 있자. 메모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대신 주기적으로 메모장을 확인하며 옮겨적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내가 은연중에 내가 필요해서 내가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변화겠지.
"비교할 필요 없어. 누군가 보고 따라갈 거 없이, 없는 거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너는 너답게 괜찮은 사람이면 돼. 그럼 굳이 조바심 내거나 속상할 필요도 없잖아."
책에서 봤으면 너무나 뻔한 소리라고 코웃음을 치고 넘겼을 말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최근에 들은 어떤 말보다 어깨를 두드려주는 말이었다. 귀한 힌트를 얻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