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이별에도 징조가 있다
004. 우정의 기쁨과 슬픔을 생각해본다
갑자기 생각나는 걸 어떻게 설명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손에 꼽을 만큼 적고, 그래서 그들이 자주 생각난다. 좋은 음악을 발견하면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 Z가 떠오르고, 휴일이 많은 요즘에는 초콜릿을 만드느라 연휴 앞뒤로 바빠지는 친구 O가 떠오른다. 보통 그때마다 바로 카톡을 보낸다. ‘이번 주에 어린이날, 어버이날까지 있어서 더 바쁘겠네. 이제 빨간 날만 보면 네 생각이 난다. 힘내고 다음주쯤 맛있는 커피 마시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늘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었고, 그게 때때로 섭섭함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다. 왜 너희들은 내게 연락하지 않아?라고 물으면, ‘그 전에 네가 먼저 연락하잖아’라고 하거나 ‘알잖아, 난 원래 누구한테 먼저 연락하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별 수 없었다. 나는 좋아하면 자꾸 생각하고, 생각나면 부르고 싶은 걸.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 연락하는 것이니 별 수 없지. ‘먼저 연락하는 일’에 관한 자의식은 진작에 털어냈다.
친구 O는 최근에 가까워졌다. 한동안 얼굴과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 한 발짝 다가갔더니 쑤욱 가까워졌다. 결이 맞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바쁜 날에도, 서로 멀리 살아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잠깐씩 얼굴을 봤고,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O의 단골 카페를 몇 번 다녀왔다.
새로운 친구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다. O를 통해 나와는 또 다른 삶을 경험하고,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랜만에 사람 여행의 즐거움을 누렸다.
“내가 정말 평소에 이런 얘기는 하지 않는데... 정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 O의 말인즉, 자기가 우연히 내 생각을 한 날에 꼭 나에게 문자가 왔다고 했다. 오늘, 지난번에 함께 갔던 카페에 잠깐 들를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빨간 날 지나고 보자’는 내 문자를 받아 신기하고 놀랐다는 거다.
“난 텔레파시가 있다고 믿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유도 없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서른 넘어서도 텔레파시 운운하며 킬킬거릴 수 있다니, 왠지 마음이 찌르르해진다.
좋은 관계 유지하는 거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노력해보고 싶다. 그게 날 기쁘게 하니까
그 사랑, 그 이별에는 다 이유가 있다
O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유난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나는 지난 해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잃었다. 나의 가장 친한... 이라거나 나의 가장 오래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친구였다.
한동안 연락이 뜸해 전화를 했더니 그는 대뜸 차가운 말을 쏟아냈다. 자기가 나를 잘 모르고 있었고, 내가 더 이상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 관계에 손을 놓고 싶으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했다... 이제 친구도 아닌데 두고 보긴 뭘 두고 봐.
‘그간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이제는 예전엔-친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예전엔-친구는 내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친구다. 예전엔-친구가 전화로 내게 쏟아낸 말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말 친구가 몇 안 되는데 그 마저도 굳이 나와의 관계를 끊어내겠다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무지 슬펐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와 가까워지면서도 예전엔-친구 생각을 했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끊어내야 했을까. 이 새로운 친구도 언젠가 멀어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O와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예전엔-친구가 그저 하루아침에 폭탄선언을 한 게 아니었겠구나 하고 말이다.
예전엔-친구가 나와 가장 오래된 친구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같이 좋아하고 즐기는 게 있지만, 그럼에도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말도 마음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서로의 말이 서로를 긁었다. 감정을 나누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습관처럼 연락하고, 때 되면 만나서 시간을 보냈지만,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섬에 있다가 헤어지곤 했다. 그땐 각자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때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아마 예전엔-친구가 끊어내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서서히 멀어졌을 거다. 우리 사이에 기쁨이 없으니까. 어쩌면 그가 먼저 '끊어졌다'고 선언하는 일로 이 지지부진한 관계를 비로소 환기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에도 징조가 있듯, 이별에도 반드시 징조가 있다. 꼭 연인사이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나누는 일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너무 익숙해서 때때로 그 징조를 눈치 채지 못할 뿐이다. 갑작스런 변심은 택배 상자를 열 때나 가능한 일이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외치던 20대 초반 이후에 겪은 사랑과 이별을 떠올려보면,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사랑에 빠지기 직전부터 이미 사랑하고 있었고, 헤어지기 전부터 마음은 있던 자리를 떠났다. 징조를 눈치채고 서로 조치하지 않는 한,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났다.
예전엔-친구에 관한 상실을 나 나름대로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돌이켜보고 나니 마음을 들끓게 하던 미움이 가셨다. 최소한 ‘친구 O도 나중에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은 가셨다. O와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여실히 느낀다. 우리가 좋은 때에 만나 좋은 우정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간이 흐르고 관계가 무르익어 어느 날엔 나와 O 사이에도 말로 나누지 않은 어떤 징조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때 결코 그 징조를 무시하지 말고, 늦지 않게 마음을 나눠야겠다. 마음을 나눈다고 모든 상황이 해피엔딩을 맞는 건 아니겠지만, 그게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닐까 싶다.
덧1)
예전엔-친구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다. 7년 마다 되돌아보면 인간관계가 크게 바뀐다는 이론이 있다고. 그 얘길 들었을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과 평생 함께 늙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7년이 흘렀고, 정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친구들과 지금 내게 자기 세계를 열어주고 있는 친구들에게 애틋한 마음이 크다. 어디 가지 말고 같이 있자, 같이 늙자, 친구들아.
덧2)
오늘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과거에 해묵은 감정들이 올라와 기록되는 까닭이 뭘까? 지난 번 이야기도 이번 이야기도 굳이 기록하고 싶지 않았는데 쓰게 됐다. 해묵은 감정들이여. 다 올라와라. 그거 다 걷어내면 뭐가 있는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