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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y 18. 2020

서른 훌쩍 넘어도 두려운 건 두려운 거구나

010. 어른 되면 눈치 안보게 될 줄 알았지 

  


'3월의 공포'는 옛말인 줄 알았지


3월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학생에게는 늘 힘든 시간이었다. 새 학기를 앞두고 방학이 끝날 즈음, 새로 배정받은 반에 친한 친구가 없으면 개학이 다가오는 내내 초초해하곤 했다. 친구를 잘 사귈 수 있을까? 친한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초등학교 6년, 중 고등학교 6년, 도합 십여 년 동안 좋은 친구가 생긴 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해도 있었다. 좋은 친구가 생겼던 해도, 그렇지 않았던 해도 기쁜 날은 기쁜 날대로 있었고, 속상한 날은 속상한 대로 있었다. 와, 그 12년. 친구 사귀는 일이 남들보다 어렵고, 내성적인 내가 12년을 무사히(물론 무사하지 않은 순간도 있었지만) 어쨌든 넘기다니. 나에게는 좀 기적 같다. 


  회사 생활은 좀 달랐다. 운 좋게 기수로 묶여서 저절로 친구들이 생기기도 했고, 나는 친구 말고 언니, 오빠 등 윗사람하고는 쉽게 친해지는 편이라 선배들이 있는 조직의 막내 생활은 너무나 즐거웠다. 그리고 최근 한동안은 프리랜서로 혼자 일을 했고,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어서 ‘3월의 공포’는 옛날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 어른이 되었고, 예전과는 달라졌고, 요즘엔 어디서라도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은 걸. 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아, 라고 생각했는데-



난 내가 다른 사람이 

된 줄 알았지


  이번 해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코로나19로 내내 비대면 수업을 하다가 코로나 확진자가 0명이 되기 시작한 5월 초에 대면 수업 이야기가 나왔다. 5월 첫 주, 처음으로 입학한 학교에 가봤다. 수업이 예약된 강의실 외에는 전부 닫혀있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캠퍼스를 돌아다니니 묘한 설렘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같은 과에서 공부하는 동료들도 만나보고 싶었다. 물론 오늘 수업은 단 8명밖에 오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지 강의실에 들어가자 반가운 마음을 조금도 내색하지 못했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은 띄엄띄엄 앉아있고,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딱히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었고, 쉬는 시간이 되자 이미 알고 있던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가거나 밖으로 나갔다. 아, 이 반에 신입생은 나뿐이구나. 


그때 찌르르 몸에 다가오는 그 느낌, 오래 전 3월이면 학교에서 그 불유쾌한 감정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혼자서, 아는 사람이 없다는 데에서 느껴지는 그 어색함과 낯설음이라니. 이걸 다 극복해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냥 그런 상황이 더 이상 오지 않아서 잊고 지낸 것뿐이구나.


  이 낯설음의 정체는 뭘까? 이 공간에서 나만 아는 사람,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왜 불안이, 공포가 되는 걸까?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구하면 되고, 이 수업은 잠깐의 시간이니 두고두고 혼자 있을 것도 아닌데. 내 습관적인 사고가 이 잠깐의 순간을 확대 해석해서 문제를 키우고 있다. 두고두고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지? 계속 혼자 있게 되면 어떡하지? 


  정말 짜증이 나는 포인트는 이 편향되게 뻗어나가는 불안한 사고가 굉장히 습관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불안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무의식이 ‘그럴 듯한’ 상황을 만나자 너무나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든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이날, 굳이 할 말도 없지만,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들고 싶어서 옆쪽에 앉은 친구에게 몇 마디 말을 걸었다. 마치 소개팅 자리에 나와서 정보를 교환하는 것 같은 어색하고 재미없는 대화였다. 나는 결이 맞는 사람을 직감적으로 알고, 우리가 서로 알아본다고 믿지만, 현실 속에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 뒤돌아있는 타인의 등을 두드린다. 그러고 돌아오는 길이 영 개운치 않았다. 정말 별일 아니었지만 - 정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예전의 내 모습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실체가 있는 것인지

습관적인 것인지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괜찮아 보여야’ 마음이 편하구나.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는구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구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더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생각의 폭을 넓혀도 내 몸이 먼저 그렇게 반응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들어, 낯선 환경에 혼자 놓이면 불안해진다. 인정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건 그 상황이 내게 주는 실제적인 불안이나 압박이 아니라 내가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내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이해하자. 예전에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는 류의 것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리 없을 거다. 앞으로도 눈치 보지 말자고 글을 쓰면서 온몸으로 눈치를 보고, 혼자여도 괜찮아,라고 진심으로 말은 하지만, 혼자라서 불안해할 지도 모른다.  그럴 때, 그러니까 몸에서 먼저 반응이 올 때, 놀랄 것도 없다. 다만 이게 진짜 실체가 있는 불안이고 두려움인지, 나의 습관적인 것인지 그 정도만 구분할 수 있다면 좀 낫지 않을까? 그리고 또 그런 순간이 오면 무엇이 어떻게 불편했는지,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된다고. 문제 없다고. 


기억하자. 나는 ‘낯설고 혼자인 것은 두렵다’는 명제 말고도, 이미 나는 ‘낯선 것은 곧 익숙해진다’는 것. ‘상황은 바뀐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나라도 이때까지 별일 없이 잘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초중고 12년을 버틴 사람이라구,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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