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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y 15. 2020

견디기 힘들 때 꺼내 쓰는 ‘마지막’이라는 카드

009. 환경의 변화로 만들어내는 단절의 힘 (3)

즉시 모든 게 괜찮아지는 

마지막 카드의 효과



  도시재생사업. 말만 그럴싸한 이 사업 때문에, 아침마다 귀를 때리는 소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야했다. 도시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선택한 곳이지만, 1, 2년 전부터 도시재생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정말 쉬지 않고 집 앞 도로를 파내고, 수도관을 교체하고, 보도 블럭을 교체하고, 무슨 회관을 세운다고, 전망대를 세운다고 또 알 수 없지만 또 뭔가를 교체하거나 세우느라 집 앞 좁은 골목은 일주일에 한번 꼴로 커다란 트럭이 막아서고 있었고, 통행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이 모든 작업의 계획은 바로 코앞에 사는 세입자에게 통보되지 않았고, 때로는 7시부터, 때로는 주말에 작업을 하느라, 우리 집은 고요함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아침마다 땅을 깨부수는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일은 꽤 고약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또 뭐야’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이사를 결심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떠나고 다음 사람이 살게 될 즈음에는 모든 게 정비되어 더 살기 좋은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음에 특히 민감한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끝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땅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더 이상 마음이 괴롭지 않았다. 이사를 준비하는 일이 마법 같은 효과를 만들어 냈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이니까, 더 이상 이 소리를 들을 일도 없을 테니까. ‘마지막 카드’를 꺼냈더니 어떤 소음도 내 마음을 시끄럽게 하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효과 아닌가. 



안심해너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있어



  누구나 한번쯤 ‘마지막 카드’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거다. 특히 퇴사하기 직전에 나는 이 카드를 자주 썼다. 퇴근하고 싶은 심정으로 시작하는 출근길. 시작하기 전부터 지긋지긋한 일상이었지만, 퇴사를 마음먹고 ‘이제 다 마지막이야’라고 쓰여 있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니 마음을 힘들게 하던 것이 깨끗이 사라졌다. ‘마지막 카드’는 개운함 뿐 아니라 연민과 아쉬움을 동반하는 카드라 평범한 일상이 새삼 애틋하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이게 다 마지막이니까!


  정말 모든 문제는 내 마음에 달려있는 걸까? 상황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지막 카드’만 꺼내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다르게 인식되니까 말이다. 물론 내 마음에 달려있다고 해서, 그게 해결하기 쉬운 문제가 되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상황이 너무 견디기 어려울 때, 모든 것이 지루하게만 느껴질 때, 나에게는 ‘마지막 카드’라는 게 있다는 걸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건 자주 쓸 수는 없지만, 정말 효과 만점인 강력한 카드니까. 


습관을 바꾸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공간적 단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우리의 의지력 못지않게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 웬디 우드 교수의 책 『해빗』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거기에 이런 조사 결과가 나온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마약에 중독되었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이 중독을 끊어냈지만, 거리에서 생활하는 마약 중독자들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보다 중독을 끊기 훨씬 어렵다. 이들에게는 변화의 계기가 될 시공간적 단절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에 놓이면 인간은 습관에 의지하는 대신 현재 자신의 목표에 부합하는 행동을 선택한다.” 원치 않는 행동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환경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환경의 변화란 꼭 이사같이 거창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변화를 인식하게 만드는 작은 행동 - 그것이 소음을 견디기 위한 스피커를 산다든지, 기록을 한다든지 등등-에서 시작될 것이다.


‘마지막 카드’의 효과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견디기 힘든 경험이라도 그것을 일회적인 것으로 만들고, ‘안심해. 네가 싫어하는 이 상황과 이제 곧 단절될 거야.’라고 말해주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아닐까. 이사라는 정말로 커다란 공간적 단절을 준비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매일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루는 반복되는 법이 없고, 다시 되돌아오는 법도 없다는 것. 다만 너무 쉽게 오늘과 닮은 내일이 찾아와서 ‘오늘 이 시간이 마지막이야’라는 카드 효과가 무색해 진다는 것도 안다. 이런 시간에는 ‘마지막 카드’보다는 ‘오늘 잘 보낸 하루하루가 누적되어 너의 내일을 만들거야’라고 속삭이는 ‘누적 카드’가 훨씬 효과가 좋겠지. 그래도 오늘 하루에 ‘마지막 카드’를 잘 써볼 수 없을까. 비오는 창밖을 보며, 이게 이 집에서 보는 마지막 비오는 풍경이겠구나 생각하며 ‘마지막 카드’를 만지작 거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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