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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Aug 06. 2020

어제와는 다른 당신을 좋아해

001. 나의 '지금'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 


“아침에 눈을 뜨면 진짜 명치끝이 아릴 정도였어. 마음이 아픈 게 정말 몸으로 느껴지더라고.” 


“정말요?” 


“응, 그땐 공동으로 쓰는 주방에 내 식기 위치만 바뀌어도 누가 그랬냐고 화를 낼 만큼 예민한 상태라.”


“진짜요? 언니가요?”     


서로의 '어제'를 열띄게 나누었던 카페


  카페에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거푸 되물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언니는 옆 자리에 앉은 낯선 손님과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두런두런한 사람이다. 여러 개의 모임을 운영하고 있을 만큼 사람에게 살뜰하고 자상한 언니가 일 년 전만해도 사람 때문에 속앓이 하느라 하루하루 무너지는 일상을 지냈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최근에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몇 가지 사건이 겹쳐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는 내 말에 언니가 꺼낸 이야기였다.     


“나는 늘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는 사람이었어. 문제에서 도망하려고 재미있는 것만 찾아다니고, 계속 잠을 잤어. 나는 나를 잘 알아서, 작년에도 결국 내가 이 문제에서도 도망치겠구나 싶었지.”      


  언니 왈, 그래서 지난해에 인간관계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피하지 않고 그 고통을 직시하기로 했단다. 생각나는 대로 두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려고 애썼단다. 이 극단적인 처방에 몸도 마음도 정말 아팠단다. 그렇게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다보니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사람이 됐고, 작은 불행이 더 큰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그 폐허 속에서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너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말을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하고 빠져나왔다. 꽤 시간이 걸린 일이라고 했다. 


  마음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보고 나서야 그 실체를 알게 됐다. 나를 괴롭히는 일일 뿐이구나-라는 것, 회피하는 것도 무방비하게 직면하는 것도 나를 지키는 방법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때부터 언니는 그림책이나 워크샵 등을 통해 자기 마음을 건강하게 들여다보고 감정을 풀어내는 훈련을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 맑은 얼굴로 앉아있다.      


  나 역시 내면의 갈등과 감정을 풀어낼 나만의 방법이 필요하다. 


  더불어 완전히 무너진 폐허 속에서 자기만의 방을 온전히 복구해 낸 언니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변신에 가까울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된 언니가 나의 회복의 희망이자 증거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언니도 좋지만 그 폐허의 시간을 더해 낸 언니가 더 좋았다. 언니를 보니 알겠다, 나는 어제와는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 어제의 당신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의 당신을 더 사랑하는 일을 즐긴다. 



장마철, 오랜만에 만난 파란 하늘.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처럼 우리도 사실은 부단히 변(신)하고 있는지도.


  며칠 전에도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인터뷰 한대목이 떠올랐다. 꽤 유명해진 작가가 자신의 무명시절을 회고하는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제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고는 있는데,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불안하고 회의감이 자주 들었어요. 그땐 정말 혼자 있는 기분이었어요.”

      

  어라, 내 얘기잖아. 내가 지금 딱 그 방에 있는데. 혼자 있는 어두운 방. 


   이런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다. "옛날에는 힘들었고, 그땐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어요." 부러운 서사. 예전에는 늘 그의 '지금'에 초점을 맞춰 들었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그의 '옛날'을 떠올렸다. 누구나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누구나 그런 시간을 거치는구나.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마이크가 주어져서 알게 되는 것 뿐.  


성공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자기 삶 속에서 어둠의 시간, 혼자의 시간, 불안과 회의감의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언젠가 나도 ‘저, 예전에 그런 시간이 있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내 어둠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검은색이 뒤섞여 있다. 매트한 검은색, 매끈한 검은색, 옅은 검은색, 암흑색……. 순간순간 가지가지 느끼는 불안과 자괴감이 있다. 언젠가 이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날이 오면, 그냥 “아, 힘들었어요. 깜깜하더라고요.” 같은 뻔한 말로 눙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의 시간을 색색깔로 기록해두어야하지 않을까? 매일 아침 '나 할 수 있을까?'같은 지루한 말만 반복하지 말고 이 과정의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은 흘러가고 말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든 혹은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되어 있든 나는 시간이 흐르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 생각대로 되길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흘러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더 흥미로운 시간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때 제가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지금, 지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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