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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Jan 28. 2019

슬픔을 기억하는
마음에 관하여

잊을 수 없는 문장들

이번 주에 ‘내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소설의 문장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았다. 하나만 이야기하라고 해서 오래 고민했다. 좋아하는 문장을 묻는다면, 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 나오는 연인의 문장을 꼽았을 텐데. (세상 로맨틱한 장면이다!) “오늘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해서 조금 더 슬퍼졌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 넌 매일 둘 다 조금씩 더해져.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슬프다는 거지.”


결국, 2007년 (출간 직후)부터 줄곧 마음에 품어온 김연수의 이 문장을 꼽았다.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여전히 좋아하는 문장이지만, 이건 20대 시절의 문장이 아닐까. 지금에 걸맞는 문장은 무엇일까? 최근에 쓴 노트를 뒤적였다.  




최근에 기록한 문장은 대부분 책에서 발췌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말 속에서 건진 것들이었다. 이런 뉴스 기사의 문장도 적어두고 소리내어 읽어본다. 슬프고 이상하고 막막하고 슬픈 문장.


“지난 12월20일 각종 노동재해 및 안전사고 피해 가족이 국회 앞에 모여 기자회견을 했다.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를 비롯해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2005년 뇌종양 판정을 받은 한혜경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씨,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다 급성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세상을 떠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2015년 삼성전자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김영신씨, 2017년 남대서양에서 실종된 스텔라데이지호 선원 허재용씨의 누나 허경주씨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미숙씨는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기에 노란색 세월호 리본과 주황색 스텔라데이지호 리본을 달았다.” (시사인: 아들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2주)



지난 해 12월 뉴스에서 들은 세 사람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던 날부터, 목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딸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비록 용균이는 누리지 못하지만, 아들에게 고개를 들 수 있는 면목이 생겼습니다” 국회에서 김용균 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 김미숙 씨의 말이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목숨을 잃은 임세원 교수의 동생이 기자들 앞에서 했던 말도 옮겨 적었다.


또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윤창호의 친구들이 했던 말도 기록했다. “어느 날 다 같이 침통하게 병원에 모여 있는데, 누군가 ‘창호라면 이럴 때 당장 피켓 들고 국회를 찾아갔을 텐데’라고 한 게 시작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창호는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이 생길 때 좌절하기보다 그걸 변화의 계기로 삼을 사람이 분명하더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창호라면 했을 일을 대신 하자.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비극 앞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강력했다. 다들 허둥지둥할 때, 가장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 정확하게 사건의 본질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이 법을 만들기도 하고, 수많은 뉴스의 제목을 바꾸었다. 내가 아는 슬픔의 의미를 바꾸었다. 굳었지만 상기된 얼굴로 김미숙 씨가 저 말을 했을 때, 곁에 있던 노동자가 와락 안기며 “고맙습니다.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하고 크게 울을 때, 나도 엉엉 울었다.


다시 읽어도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하는 말이지만, 저 말 속에 있는, 슬픔을 넘어선 슬픔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생각에 그건 조금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금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일을 하고, 공부하고, 글을 쓰는 것. 조금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말을 하는 것, 충동적인 말보다 정확하게 말하는 것, 늘 나를 위해 해왔던 일들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 그게 슬픔을 넘어선 슬픔을 기억하는 내 방식이다. 이타적인 마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올해의 질문이다. 2019년 1월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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